◎1896년 4월7일 창간 의미/미유학 개화파 청년지식인 서재필주도 창간/국민참정권 주창서 탐관오리 고발·비판까지/“불편부당·공평무사 정신은 한국언론의 장전”올해는 한국신문이 100주년을 맞는 해. 1896년 4월7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된 독립신문이후 100년동안 우리나라 신문은 수난과 탄압 속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 이제 세계화시대, 멀티미디어시대를 맞은 신문의 진로와 역할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1세기동안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4일, 5일 이틀동안 2페이지씩 「한국언론 100주년」특집을 싣는다.<편집자주>편집자주>
1896년 4월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태어난 독립신문은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변혁의 횃불」이었다. 1890년대는 개화의식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인식한 개화파는 개화사상을 전파하고 국정을 개혁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신문을 냈다. 독립신문은 국내의 개화파와 미국유학을 한 청년지식인 서재필(1864∼1951)의 노력으로 3개월의 짧은 준비기간을 거쳐 탄생했다.
당시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1895년 2월17일 창간)가 고종의 아관파천등 조선의 친러정책을 비방하자 정부는 창간자금 4,400원 전액 지원, 취재 편의제공 등 혜택을 주면서 독립신문의 창간을 도왔다. 그러나 기사 편집등 전체적 신문제작과 운영에서는 정부로부터 독립적 위치를 지녔기 때문에 언론학자들은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중국등 동아시아국가의 초기 민간신문들은 우리보다 창간시기는 빠르나 영국인등의 도움을 받아 탄생했다.
초창기 독립신문은 격일간 타블로이드판 4면이었으며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1898년 7월부터 일간으로 발전했다. 1∼3면은 한글판으로 1면에 논설, 2·3면에 국내외기사, 3면에 광고를 실었고 4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이었다. 창간 이듬해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해 2종으로 발행됐다. 국민의 참정권과 의회설립의 필요성, 자주독립과 국가발전등을 주장하는 논설과 부패한 정치 탐관오리의 횡포를 고발·비판하는 기사로 박수를 받았다. 특히 국민들은 독립협회가 고발한 비리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사례를 보며 근대적 시민의식에 눈을 떴다. 극동지역 신문사상 처음 발행된 4면의 영문판은 조선과 외부세계를 잇는 교량역할을 했다. 당시 한반도 진출을 시도하던 일본·러시아회사들이 정기적으로 광고를 내기도 했다.
창간호로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한때 발행부수가 3,000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신문을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고 시장에서 낭독까지 했던 점을 고려하면 독립신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 비판에 앞장선 독립신문은 친러수구파의 탄압과 정부소유 사옥의 회수등 어려움이 겹쳐 편집진이 사직하면서 1899년 12월4일자를 종간호로 폐간됐다. 발행한 총호수는 한글판 776호, 영문판 442호였다.
비록 3년8개월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독립신문이 언론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발행정신과 신문제작기법, 경영등 모든 면에서 초창기 한국언론의 모델이 됐고 비판적 기능과 외세·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은 한국언론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독료와 광고료를 주축으로 경영자립을 시도, 이후 창간되는 민간신문들은 모두 이같은 운영방식을 따랐다.
정진석 한국외대교수(언론사)는 『불편부당, 공평무사, 정부와 국민간의 의사소통등 독립신문의 창간정신은 오늘날에도 「한국언론의 장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박천호 기자>박천호>
◎독립신문 창간정신/자주정신 반영 한글 전용
독립신문의 창간논설에 드러난 창간정신은 10가지로 요약된다. (1)불편불당하고 (2)양반과 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 없이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대하며 (3)국민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대변한다 (4)정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려 정부와 국민 사이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하며 (5)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고 (6)신문값을 저렴하게 하여 많은 국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7)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비행을 고발하며 (8)영문판을 발간, 한국사정을 세계에 알리며 (9)국민에게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리고 (10)국민에게 외국의 사정을 알린다.
언론학자들은 독립신문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글전용을 실시한 것은 자주·독립·주체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박천호 기자>박천호>
◎한국언론의 선각자들/한글학자 주시경·윤치호도 독립신문 참여/황성신문 장지연은 지조로 언론인 귀감
독립신문이 창간되던 구한말 언론계는 인재의 집결지였다. 많은 우국지사, 학자, 문인들이 언론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근대화의 문을 열고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서재필과 장지연은 여명기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인물. 미국에서 공부한 서재필은 1894년 갑오경장이후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이듬해 귀국,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나 친러파 압력에 밀려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한국을 근대의 단계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한 「한국의 볼테르」』라는 찬사와 『미국사람 필립 제이슨으로 행세하며 일본에 의존하는 독립을 주장했다』는 비판이 엇갈리지만 한국언론사에 남긴 자취는 지대하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한 인물로는 한글학자 주시경, 갑오경장이후 독립협회장을 맡는등 정치의 중심무대에서 활동했던 윤치호, 독립협회의 임원이었던 손승용,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등이 있다. 독립신문의 회계사무겸 교보를 맡았던 주시경은 「국문론」등 2편의 논설을 게재했고 1898년 제국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 미국으로 떠난 후 독립신문의 주필겸 실질상의 경영자로 격일간이던 독립신문을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손승용은 시장과 관청에 다니며 기사를 쓴 취재기자였다.
황성신문 주필겸 2대 사장을 역임한 장지연은 지조와 용기로 언론인의 귀감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직후 황성신문에 조약의 부당함을 통박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 한국언론사에 길이 빛나는 논설을 남겼다.<변형섭 기자>변형섭>
◎어떻게 운영했나/광고가 주수입원… 월구독료 쌀 넉되값/기자 손승용 등 2∼3명 포함 전직원 10명
독립신문은 광고를 주수입원으로 삼은 최초의 신문이었다. 광고료는 한글판이 1단(28행)기준 1년 40원, 6개월 24원, 1개월 5원, 1회 50전. 1897년 6월17일자에는 러시아산 훈제연어, 소시지와 잡화를 소개하는 영문전단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창간당시 가판 1부값은 동전 한푼(1전·영문판 5전), 정기구독료는 월 12전(영문판 75전), 1년 1원30전(영문판 6원)이었다. 당시 쌀 한 되 값은 3전5푼 정도였다.
기자수는 손승용과 주시경등 2∼3명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탐보원」으로 불리던 기자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주사에 알리면 주사는 취사선택, 기사화하는 데스크역할을 했다. 총직원은 10명 안팎에 편집과 업무가 나뉘지 않은 상태였다.<이상연 기자>이상연>
□한국신문 100년사 연표
<1880∼1910년>
1883.10.31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관보) 창간
96. 4. 7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
98. 3. 2 경성신문(황성신문 전신) 창간
4. 9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99.12.4 독립신문 폐간
1904. 7.18 대한매일신보 창간
07. 7.24 법률제1호 광무신문지법 공포
<1911∼1944년>
1913. 1. 1 최초의 어린이신문 「붉은 저고리」창간
20. 3. 5 조선일보 창간
4. 1 동아일보 창간
40. 8.10∼11 조선일보 동아일보 폐간호 발행
<1945∼1979년>
1945. 11.22 서울신문 창간
46.10. 6 경향신문 창간
49. 2.25 태양신문(한국일보 전신) 창간
50.11. 1 The Korea Times 창간
54. 6. 9 한국일보 창간. 언론사 최초로 견습기자 공채
57. 4. 7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 독립신문 창간61주년인 이 날을 신문의 날로 제정·「신문윤리강령」채택
60. 7. 1 「신문등및 정당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법률 제552호) 공포
7.17 첫 어린이일간지 소년한국일보 창간
8. 1 서울경제신문 창간
12월 한국, IPI(국제언론인협회) 가입
61. 2.11 IPI한국위원회(위원장 장기영) 발족
6.28 최고회의, 언론정책 25개항 발표. 조석간제 폐지
10.13 신문발행인협회(한국신문협회) 창립
10.23 신문 매일 8면 발행
64. 8. 2 언론윤리위법안 국회통과
8.17 한국기자협회 창립
9.27 최초의 주간지 주간한국 창간
9.22 중앙일보 창간
68. 2.27 한국일보사옥 화재로 전소
9.26 최초의 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 창간
72. 8.30 기자 20명 남북적십자회담 취재차 방북, 북한기자 23명 서울방문
<1980∼1995년>
1980. 5.17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언론통폐합
8. 2 언론인 대량해직
11.14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언론통폐합 결의
12.26 언론기본법 국회통과
81. 1. 1 신문 매일 12면으로 증면
6.22 한국언론연구원 창립
88. 4. 1 16∼20면으로 증면
5.15 한겨레신문 창간
11.26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창립
12.10 국민일보 창간
89. 2. 1 세계일보 창간
9. 1 32면으로 증면
91. 8.21 한국일보, 전국 동시인쇄시대 개막
11.1 문화일보 창간
94. 7.20 40면으로 증면
95. 5.14∼17 제44차 IPI총회 서울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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