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정국을 소연케 하고있는 장학로비리사건의 진정한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지금 정치권에서는 호재를 만난듯 개혁의 실상이 어떠니하며 이번 사건을 득표로 연결지으려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고, 반대로 악재에 기가 막힌 YS는 국민앞에 송구스럽다는 사과의 뜻을 간접적으로라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정도쯤이야 이제 국민들에겐 상식이다. 이미 앞선 정권들의 천문학적 비리·축재로 말미암아 웬만한 비리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예방주사(?)를 맞은바 있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또다른 비리가 터져 정치적 공방의 입장이 바뀔 개연성이 높은 게 우리 정치판의 숨겨진 실상인 것임도 쉽게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략차원을 떠난 교훈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우리들 삶의 이치에서 찾으면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그 교훈은 바로 「가까운 사람이 적」이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걸 가장 확실히 증명해 보인 게 바로 장씨 전부인의 『그는 한마디로 집사였다. 상도동내에 있는 숟가락 숫자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영감님이 친아들처럼 생각했다』는 인터뷰내용이었다. 부자지간으로까지 비견되는 보스와 가신사이의 헌신과 충성과 신뢰관계가 바로 오늘의 그 엄청난 배반과 딴 호주머니 챙기기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또 장씨비리를 직접 정치적으로 고발·폭로했던 것도 과거 한몸을 이뤘던 전부인과 동거녀 처남의 전처이지 않은가. 깊었던 사랑도 돌아서면 순식간에 메가톤급의 증오로 변했고,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가신의 충성심도 돈과 개인적 야심 앞에서는 그처럼 물거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제와서 측근과 가신의 비리나 배반이 처음 일어난 일인양 법석들인게 어찌보면 우습기도 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들을 암살하고, 유배보내고, 비리의 실마리를 풀어준 사람들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보라. 그 모두가 친구요 정권의 대들보요 지근의 수하이었던 걸 벌써 잊고들 있다.
야당가의 보스들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한때는 「어버이」소리도 불사하며 충성을 맹세했던 자기 사람이 공천문제로 돌아서서 퍼붓는 저주와 폭로 앞에 지금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도 시저를 찌른건 바로 아들처럼 여겼던 최측근 브루투스였고,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사임을 몰고왔던건 비서진의 간첩사건연루 때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 그런가. 가까운 사람이 왜 적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 원인이란 여러 갈래로 분석해 볼 수가 있겠다. 남녀사이나 인간관계에서는 「돌아서면 남」이라는 등 애정과 신뢰관계의 상실을 꼽을 수 있겠고, 절대권력은 내부에서부터 절대 부패하게 마련이라는 일반론이 통할 수도 있다. 또 30년 가까이 한국적인 보스정치나 지역주의에 물들어온 나머지 오늘과 같은 민주시대나 문민시절에도 군주나 봉건영주가 된양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보스 스스로의 자가당착 탓도 없다 할수가 없겠다.
또하나 원인으로 빠뜨려서는 안될게 옛 내시나 환관시절부터 비롯된 특유의 가신 증후군이다. 모자라는 사람이 절대권력자나 실력자를 너무 가까이서 모시다 보면 자신이 권력을 가진양 착각하게 되고, 주군의 약점과 한계를 너무 알다보니 실망하거나 개인적 욕심도 생겨나 스스로 권력과 주머니를 따로 챙기기에 이르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또 겹치는게 오늘과 같은 첨단 정보화사회의 비정한 속성이다. 정보야말로 돈과 권력의 원천임을 측근가신일수록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은밀한 배반의 유혹도 그래서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은 가족과 측근 가신들에게 법이나 도덕적으로 책잡힐 짓을 않고,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원칙이나 제도로 일을 추진하면서 부단히 내부 잘못을 검증할 수 있는 태세의 확립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적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자계(자계)하는 일부터 급하다.
그러고 보면 장씨 사건은 결코 누구에게나 남의 일이 못된다. 이 사건을 놓고 현실적 정략만 챙길게 아니라 삶의 교훈을 얻어야 할 시점이다.<수석논설위원>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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