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심상치않다. 「몸에 피는 꽃」이라니? 이재무는 『엄니 무덤가에 피는 꽃』을 줄곧 노래해왔던 시인이다. 죽음마저도 따뜻한 안식처가 되는 존재가 바로 그의 어머니이다. 그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것은 차라리 한국적 집단무의식이다. 이성복이 인고의 어머니를 투시했을 때나, 박노해가 『어머니, 당신 속에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라고 외쳤을 때나, 그 응시와 절규는 그리움이 없으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회귀의 심연이다.다만 다른 시인들이 어머니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애쓰고 있을 때, 이재무는 항상 그 자리에 머물렀다. 머물러 단지 서성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것의 의미를 규정하는 대신에 그것에 거푸집을 설치하고 형상을 본뜨는 일을 했다. 그 형상 본뜨기가 끝간 지점에서 둥근 젖가슴과도 같고 역시 둥근 밥그릇과도 같은 어머니 무덤이 태어났다. 신생의 젖줄이 되는 무덤! 그럼으로써 생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죽음이 마침내 생을 얻었다. 그는, 어머니의 심연을 거울로 치환시켜 탄생과 죽음의 격렬한 교대를 추적한 김혜순과 방향은 정반대지만 똑같이 어머니의 삶을 어머니 그 자신에게로 돌려주는 힘든 작업을 했다.
그 어머니가 이제는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다시 한번 옛날을 울며/울음의 동그라미 속에/나무며 꽃, 사람을 가두고 싶다』에서의 그 울음의 동그라미가 이제 사라진 것이다. 그의 밥그릇은 깨어졌고 그의 젖줄은 끊어졌다. 그는 허기지고 상처입은 짐승이 되어 『저 직선의 마을길』을 『삐뚤삐뚤하게 걸어』간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해서 아예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끈적끈적한 콜타르』와도 같은 얼룩을 남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몸 사방에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로 남아 더운 김을 피워올린다. 깨진 것은 흩어졌고 끊어진 것은 퍼졌다. 그리고 그 파편과 방울이 튄 자리에서 새 꽃들이 피어난다. 그것이 「몸에 피는 꽃」이다. 시인은 큰 어머니를 잃은 대신에 작은 어머니들을 회임하였다.
그는 어머니를 먹고 어머니들을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 이 기이한 어머니가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동요도 없이/포크레인은 빨갛게 익은 울음덩이/꼭지 비틀어 따내고 있다』와 같은 끔찍한 이미지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몸에 피는 꽃이 꽃핌을 방해하는 현실과 격렬히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싸움이 치열하지 않다면, 그 이미지가 그렇게 선연할 리가 없다.<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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