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장 연행 본인 단독결심”/월권인책 한직인사조치 소문 못들어/구속수사 승낙했다가 노국방에 보고/황영시 “철저조사” 본인에 호통/노씨와 군반대 무마 대책논의<4면서 계속>―특히 피고인은 육사 동기생으로서 「하나회」회원인 최성택장군을 수경사령관으로 추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승화 총장이 장태완 장군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요.
『최성택 장군을 수경사령관으로 추천한 사실이 없습니다』
―또한 피고인을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출신의 소장장성들은 정승화 총장을 비롯한 원로장성들로 인해 육군의 인사가 적체되는 점에 대하여도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요.
『불만보다는 참모총장이 사단장이 되고 사단장이 참모총장을 돌아가며 하는등 군이 침체돼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79년 12월초순께 군 일각에서 피고인의 잦은 월권행위와 군 지휘체계문란행위 등으로 피고인이 곧 한직으로 인사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79년 12월9일 정총장은 태릉 골프장에서 노국방장관에게 피고인의 경질을 건의했다고 하는데 피고인은 나중에라도 이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못 들었습니다』
―이에 피고인등은 피고인에 대한 인사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 소속장교들의 군내 입지를 보전하기위해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요.
『본인은 보안사령관에 합수부장까지 겸직하고 있었는데 왜 불만이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항상 자기중심인데』
―즉 피고인은 정총장을 제거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피고인의 측근세력들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되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요.
『없습니다』
―10·26사건 이후 정총장이 박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로 동행한 사실로 인해 일부 군인들 사이에 정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돼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백동림과 이학봉 등이 급거 상경하지 않았습니까.
『본인이 명령권을 가지고 당시 국장급에 명령을 했습니다. 당시 수사1국장은 이학봉이었고 그 사람들은 갑작스레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수사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오게 한 것입니다. 백동림은 당시 잠시 파견나왔을 뿐 10일정도 있다가 원대복귀시켰습니다』
―백동림은 오랫동안 보안사에서 대공수사업무를 총괄해왔고 백동림에 대한 인사기록카드가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10·26이후 11월6일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피고인 옆에 배석한 사람 2명중 한명은 이건개 전 검사이고 한명은 백동림인데 (사진을 제시하며)이 사진을 기억합니까.
『기억안납니다. 이건개는 알겠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당시 백동림은 수사국장이 아니었고 이학봉이 수사국장이었습니다』
―피고인은 79년 11월6일께 10·26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기자들의 질문에 정총장은 김재규의 범행에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히려 사태수습을 잘 했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지요.
『기억안납니다. 박대통령이 시해당한지 몇일안돼 상대적으로 계엄사령관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합수부에서 내사한다는 사실을 공개석상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이 몇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등은 정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연행하기로 했나요.
『그렇죠』
―피고인은 12·12건 이전에 노국방장관에게 정총장 연행조사문제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있나요.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시해 후 국장에게 보고받으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고 김재규는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 김계원은 청와대 2인자, 정승화 총장은 육군의 총수격이어서 수사국장이 김계원 비서실장과 참모총장에 대한 구속수사를 제의해와 본인도 바로 승락하였다가 큰일이 날 것 같아 노재현 장관에게 보고했습니다. 당시 장관은 이 사실을 듣고 굉장히 놀랐는데 지금은 안정이 제일이니까 조용히 있으라며 다음시기를 보자고 해 그냥 넘어갔습니다』
―노장관은 피고인으로부터 정총장 연행조사문제에 대해 전혀 사전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고 그가 12·12사건 당일에 합수부측에 정총장을 연행해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계속 피신하는 등의 처신을 한 것으로 보더라도 피고인은 노장관에게 사전보고를 한 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거짓진술을 하는가요.
『한두번 보고한 게 아닙니다. 노장관은 평소 형님같이 생각하는데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사실 아닙니까』
―분명히 사전보고 했습니까.
『예』
―피고인은 김재규에 대한 수사가 일단락된 79년 11월 중순께 황영시,노태우,박준병,박희도,최세창,장기오,허화평,허삼수,이학봉,장세동,김진영 등 피고인의 오래된 측근들과 접촉해 정총장에 대한 군내 여론을 탐문하면서 정총장의 연행문제를 논의한 결과,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지요.
『전혀 없습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보다 권력이 센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의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가 살아남겠습니까. 당시 여기 앉아있는 장군들은 6·25때부터 정총장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함부로 말했다가 정총장의 귀에 들어가면 어떡합니까. 보안도 보안이지만 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79년 11월24일 계엄확대회의가 끝난 후 덕수궁부근 안가에서 피고인의 생도시절 구대장으로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피고인 황영시를 만나 정총장을 조사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논한 사실이 있지요.
『안가는 아니었고 시간도 없고해서 보안사령부 사무실에서 황영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박대통령 시해 이후 피도 마르지 않았는데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가 법정에서 한 진술과 똑같은 내용을 말하는 바람에 장성들이 분노해 회의가 중단된 적이 있다는 말을 황영시가 했습니다. 황영시는 원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정직한 사람인데 그가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본인에게 야단을 치며 정총장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황영시에게 『언젠가 두고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정총장에 대한 내사얘기는 한 적이 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사 사실은 시인합니까.
『예』
―피고인은 79년 11월25일 김윤호 광주보병학교장과 군개혁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눠보라는 황영시의 전화연락에 따라 같은해 11월말께 김윤호를 만나 「군 상층부를 대폭 퇴진시키고 정규 육사출신들을 훈련시켜 적절히 배치해야한다」는 요지의 군 개혁방안을 김윤호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지요.
『대선배인 김윤호를 만나긴 했는데 김윤호는 워낙 동기생들에 비해 진급이 늦어 본인 스스로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선배와 이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한적도 없고 연락이 와 만나 인사하고 곧 돌려보냈습니다』
―피고인은 79년 12월7일께 보안사령관실에서 피고인 노태우를 만나 정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같은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서 황영시 등 다수의 측근장성등이 모이기로 하였지요.
『12월6일 본인 단독으로 정총장 연행을 결심하고 그날 제1수사국장에게 연행세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다음날인 12월7일 노태우로부터 박대통령 시해장소에 있던 정총장에 대한 조사를 하지않아 군에서 말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태우와는 평생을 통해 아주 친한 친구여서 이날 정총장을 연행조사할 계획이란 말을 했고 수도권 주요 지휘관을 초청, 군의 반대를 수습할 방안이 없겠는지 여부등을 논의했습니다. 그래서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 외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도권의 지휘관 10여명을 모은 것입니다』<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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