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기 쉽고 짝수 좋아 12·12택일”/경복궁모임 대부분 본인에 속아 참석/최 대통령 총장 연행불가 말한적없어/노 장관에 사전설명위해 보안사 초치/정 총장 연행계획 12월6일부터 수립<5면서 계속>―89년 11월31일 노태우씨 집권당시 4당합의에 따라 전피고인이 국회에서 노태우,황영시와 접촉해 군개혁방안에 대한 논의를 했다고 증언했는데 국회증언은 잘못된 것입니까.
『국회증언은 잘못됐습니다.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당시 백담사에서 비서관 한두명과 시간이 촉박한 상태에서 빈약한 자료로 증언문을 작성한 뒤 증언 당일 새벽에 백담사에서 일찍 나와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당시 증언을 번복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법정의 증언도 번복하는 것 아닙니까.
『처벌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피고인은 신현확국무총리 내정에 따른 개각 전날인 12월12일 정승화 총장의 연행조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그 결과를 개각에 연결시켜 육군참모총장이 교체되도록 하는 등 군 인사에 반영할 의도로 12·12을 거사일로 결정하게 된 것이지요.
『아닙니다. 개각문제는 전혀 몰랐고 본인은 놀음은 못하지만 외우기 쉬운 숫자나 짝수를 좋아합니다. 월남에서도 작전을 하면 4월4일 같은 짝수일을 골랐습니다. 대통령 취임도 3월3일로 한 것처럼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피고인은 79년 12월9일 피고인의 자택으로 박준병, 최세창피고인을 불러 정총장 조사의 필요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그 문제를 논의하기위해 장성들이 모이기로 했으니 12월12일 하오 6시까지 30경비단으로 오라고 했지요.
『박준병피고인은 오라고 한 기억이 없습니다. 최피고인은 군의 여론을 알아보기위해 불렀을 뿐입니다』
―정총장을 연행하기로 결심한 12월6일부터 연행계획을 수립했지요.
『예』
―피고인은 같은해 12월초순께 수사실무자인 이학봉피고인과 대공관계에 많은 수사경험이 있는 허삼수피고인과 상의해 정총장연행을 위해 전체 수사계획을 수립하도록 했지요.
『그렇습니다』
―전체 수사계획에 대한 통제 조정은 허화평피고인이 담당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피고인에게는 상당히 늦게 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요한 내용인데 너무 여러사람에게 말하면 누설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학봉피고인이 연행장소로 육군본부, 노상, 총장공관 등의 선정을 검토한 결과 총장공관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같은달 8일 피고인에게 이를 건의했다는데.
『그랬던 것 같습니다』
―79년 12월9일께 이학봉, 허삼수피고인과 우경윤 등에게 구체적인 연행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지요.
『예』
― 재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당시 군여론이나 미국과 일본신문에서 여러차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등 대통령도 그 사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재가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총장의 연행에 대응해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헌병감 등을 12월12일 당일 만찬초청형식으로 유인한 것은 그들의 부대지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조홍 대령이 헌병에서 혼자 장성으로 진급해 자축연을 열어달라고 해서 자축연 날짜를 본인이 정해줬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연치고는 너무나 묘한 우연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방청석 웃음)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는 정총장을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연행하려고 할 경우 정총장이 피고인 등의 연행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경우 군의 정식 지휘계통이 하극상이라며 병력을 동원해 피고인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황영시피고인도 진술했듯이 원래 30경비단장실이 아니라 보안사령관실에서 모이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령관실은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30경비단장실로 옮겼던 것입니다. 대부분 그냥 저녁 먹으러 오는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노태우피고인만 그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일 장성들이 모이면 정총장의 연행배경과 정당성 등을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장성들은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이들은 본인에게 속아서 그날 모이게 된 것입니다』
―30경비단에 모인 장성들은 수소지역을 이탈한 것이 아닙니까.
『지휘관들에게는 통제지역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장성들은 서울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수소이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단순히 저녁을 먹으러 30경비단장실에 왔던 것입니다』
―당시 피고인도 정총장이 피고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 장차 피고인의 신상에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검찰이 이 부분에 대해 여러차례 같은 내용의 신문을 계속하자 전상석 변호사가 이의가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검찰이 병력동원 부분을 끌어내기 위해 유도질문을 하고 있다』며 이 부분에 대해 계속된 신문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이양우 변호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형사소송법상 답변유도등은 못하게 돼있다』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대해 재판부도 되도록 같은 질문을 여러차례 하지 말 것을 검찰에 요구했다.
―전재국씨를 알지요.
『예,압니다』
―80년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하면서 10월1일자 조선일보에 아들과 가족들에게 거사에 앞서 『아버지가 혹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는데 맞습니까.
『교육목적상 그같은 말은 했었습니다』
―30경비단 참석자들은 육본측의 병력동원을 저지하면서 필요시 자신들이 지휘하는 부대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수경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의 체포등을 지시했지요.
『체포지시를 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고 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지휘부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전혀 지휘부의 기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총장이 당시 피고인에게 연락을 취해 잠깐 만나자고 한 사실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은 그날 하오 최성택장군과 함께 지프를 타고 정총장에게 간 사실이 있지요.
『지프가 아니라 승용차를 타고 갔습니다』
―피고인은 그 당시 최성택 장군에게 정승화 총장의 연행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입니까.
『안했습니다』
―혹시 그이유가 평소에 정승화 총장에 대해 그의 군인정신이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존경한다고 하였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장군이 정총장을 존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세동 대령이 30경비단 참석자들에게 『혹시 일이 잘못되면 육본 중견간부들로서 측면지원해 달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는데 장대령에게 부탁한 사실이 있습니까.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장세동에게 30경비단 모임에 대해 어떻게 말했나요.
『장대령에게는 저녁을 같이 먹으러 몇분들이 오는데 차라도 준비해서 잠시 기다리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최세창피고인은 이학봉 피고인으로부터 『정승화 총장과 친한 관계에 있는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헌병감등을 일단 연희동 요정으로 초청하여 부대와 격리시켜 놓은 다음 합수부장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총장을 일단 연행한 후 그전말을 그들에게 이해시켜 그들이 경솔하게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 연희동 만찬 모임을 추진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모르겠습니다. 이학봉이 입이 싸서 그런 것 같은데. 우국일 참모장과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때 채동욱 검사가 전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계속했다.
채동욱 검사=피고인은 12월6일 12일을 거사일로 최종결정하고 12월11일 조홍 장군의 진급사실을 알았는데 11일 조홍의 진급을 자축하기 위해 다음날 저녁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맞나요.
『맞습니다』
―피고인은 12일 오후 같은 시각에 30경비단장실로 군장성들을 모아놓은 상황에서 수사총책임자로서 한가하게 진급을 자축하는 자리에 참석할 계획이었나요.
『물론이죠. 수사에 대한 실무적인 총책임은 수사국장에게 있었기 때문에 합수본부장은 가끔 저녁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헌병병과의 장성진급은 2년에 한명씩 진급하기 때문에 정식발표가 있기전에 미리 결정돼 버리고 그 결정이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본인이 하도 좋아하는 바람에 선배로서 장태완 장군등이 참석했고 나는 선배로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홍이 장소를 결정했고 나는 시간만을 정했습니다』
―사실상 30경비단장실에 장성들을 모아놓은 상황에서 「신촌모임」에 가는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에 30경비단장실에 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얻은 뒤 저녁식사를 하지않고 댁으로 돌려보낸 뒤 저녁모임에 참석할 생각이었습니다』
―피고인은 12일 상오 보안사령관실에서 허삼수 피고인등에게 같은날 하오 7시께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여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라고 지시하였지요.
『가급적 협조를 얻어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허삼수 피고인은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총무국장으로서 수사와는 무관함에도 불구, 정승화 총장의 연행이라는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긴 이유는 뭡니까.
『사실은 정총장의 세칭 심복이 우경윤이었습니다. 우경윤은 당시 CID대장이었는데 쉽게 말해 검찰의 공안이나 특수부에 해당합니다. 또 허삼수는 빠릿빠릿했고 더구나 수사조정국장이었습니다. 총무국장이라는 말은 잘못된 겁니다. 따라서 수사2국장과 수사조정국장을 보낸 것입니다』
―혹시 허삼수가 하나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73년부터 하나회는 없어졌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연행을 거부하면서 이재천 수행부관에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 그가 부관실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자 합수부수사관인 김대균, 한길성, 박원츨등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난사하여 상관인 이재천과 김인선 경호장교등을 살해하려 하였다가 머리와 허리등에 부상을 입힌 사실이 있지요.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부상을 당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피고인에 대한 검찰 신문이 진행되던 하오 4시33분께 석진강 변호사는 재판부에 발언기회를 요청, 『신문사항이 너무 사소하고 구체적으로 계속되는데 시간상 신문을 줄이도록 하는게 낫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신문사항이 너무 구체적이더라도 피고인이 자신에게 이익되는 진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좀더 참고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김부장판사는 그러나 이어 검찰에 대해 『사소한 질문을 자꾸 반복해서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통보했다.
채동욱 검사가 전씨에 대한 신문을 계속해 나갔다.
―정총장 연행결재를 받기 위한 보고서의 주요내용은 정총장의 내란방조혐의점과 군내부 동향, 김재규 사건 공판 관련 동향등이지요.
『예』
―피고인의 재가요구에 최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재가해 줄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아닙니다. 국방장관이 배석해야 재가해 주겠다고 언급을 한 적은 있지만 재가를 거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단지 중요한 사안이므로 형식적 절차상 국방장관의 배석이 필요하다고 얘기한 것뿐입니다. 본인이 국방장관을 찾아오겠다고 하자 대통령은 「그런일이야 비서를 시켜도 되는데 앉아서 차나 마시라」고 했고 이후 2시간이상 대통령을 모시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대통령이 있던 총리공관에 병력을 동원해 장악할 당시 김진기 헌병감이 구정길 총리공관 경호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안사령관이 거기 있으면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한 사실을 보고 받았죠.
『모릅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김진기와 구정길이 이같이 통화한 사실을 알고 신변위협을 느껴 급히 공관을 빠져나갔죠.
『빠져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당시 피고인은 정동호 경호실장과 고명승 대령에게 총리공관을 장악토록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없습니다』
―정동호 경호실장이 12·12 당일밤 총리공관에서 나와 보안사등을 왕래하며 피고인에게 공관 상황을 보고 한 적이 있죠.
『정동호 경호실장이 보안사에 두번 왔다 간 적이 있습니다. 육본측 병력움직임에 대해 알아보러 다녀간 것입니다』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장악한 것은 대통령의 동태를 파악하고 연행재가를 효과적으로 받기 위한 것 아닙니까.
『그건 비약된 논리입니다. 대통령의 동태가 어떻든 합수부장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12·12당일 하오 8시 30분께 30경비단장실로 돌아와 황영시등에게 국방장관을 찾아야 한다고 지시한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피고인등이 정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거듭 요구하자 대통령은 『사건경위를 들어보고 결정할 일이므로 국방장관을 데리고 오라』며 계속 거부했지요.
『대통령이 외교관출신이라 형식상 절차를 중요시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신현확총리 진술에 따르면 최대통령이 『법을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 걱정을 했다는데.
『잘 모릅니다』
―12월12일 하오 10시20분께 최대통령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마침 전화통화가 이뤄져 총리공관으로 오라고 지시했지요.
『예』
―피고인은 노장관이 총리공관으로 가기 전에 일단 보안사로 데려오도록 지시했지요.
『보안사로 먼저 오도록 한 것은 그간의 전후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섭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장관이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데 정확히 알고 가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79년 12월12일 밤 10시30분께 보안사령관실로 돌아와 허화평피고인등 보안사 참모들과 함께 그동안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당시의 긴급한 사태수습을 위한 총지휘를 하기 시작하였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보안처장으로부터 수경사령관이 사살령을 내렸다는 보고등을 받았습니다. 하마터면 그때 사살돼 이번 재판에 서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7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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