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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아픔/모순의 수용(박경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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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아픔/모순의 수용(박경리 칼럼)

입력
1996.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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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논리·자유·합리 강조할수록 지구파괴·비인간화는 심화되고/진실찾는 시인도 결국은 미완성/생명은 양면성 가치집착 버릴때초나라 무기상인이 『이 창은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으며 이 방패는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에서 연유한 것이 모순이다. 모순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될 때 상대방을 공박하는 용어로서 매우 생광스럽게 쓰이지만 어쨌든 강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논리의 한계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며 따라서 모순의 양면성도 당연히 추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논리적이다 할 것 같으면 아시다시피 생각을 조리있게 언어로써 표현하는 것을 이르는데, 기실 언어 그 자체에는 항상 미진하고 애매하다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미진하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간들은 자기자신 속에 갇혀 있다 할 수도 있고 논리의 허약함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겠느냐」하며 옛날 우리들 할머니 어머니들이 갇힌 진실을 절묘하게 비유한 바 있었지만 결국 인간은, 또한 생명 일체는 공동체인 동시 영원한 개체로서 고독하며 모순에 가득 찬 존재인 것을 부인 못한다. 미진하고 애매한 언어,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진실과도 같은 것이며 언어와 진실의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논리의 표현이 언어에 의한 것이라면 논리의 바탕은 보편성과 개념이다. 그리고 논리로 반죽해낸 것이 합리주의라 할 수 있겠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거반을 지탱하고 있으며 합리주의의 강점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행복을 지향하는 미덕을 인정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절대적인 것도 물론 아니다. 궁극적으로 시간은 끝이 없고 공간은 무한대이며 사물의 본질은 여전히 비밀스럽다.

○틀깨기가 창조바탕

생명의 내부, 자기 자신의 의식조차 그 흐름의 편린을 건져내기가 어려운, 이것이 삶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시인이 찾아 헤매는 언어는 다름아닌 진실이며 그것과의 만남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막막한 피안. 삶 자체가 미완성인 것과 같이 시인의 노래도 그러하다. 해서 인간의 역사는 진행하는 것이며 진행이야말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합리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성싶다. 시행착오로 나타난 폐단, 그러니까 핵을 수반한 전쟁에의 위협이라든지 퇴적되는 쓰레기며 땅이 죽어가고 수질오염과 수원의 고갈현상, 생태계의 파괴와 오존층의 손상, 이러한 지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결자해지라, 합리주의에 의한 방안 밖에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같은 것은 일단 접어두고, 근본적인 문제는 논리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주체적인 것, 필연성에 합당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사오입식의 생략으로 정리해야 하는 합리주의가 하나의 틀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눈이 부실 만큼 증가하고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오늘의 사정을 생각할 때 틀 속의 내용이 과연 온전하겠는가. 앞서 말한 지구가 당면한 어려움도 포함이 되겠지만 여하튼 틀 속에 내용물이 폭주하게 되면 혼란 불균형 폭발적인 것으로 변하게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사물의 단순화가 필요해진다. 물기를 짜내어 중량을 줄이게 되고 두꺼운 것은 보다 얇게, 복잡한 것에는 생략으로 대응하고, 인간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영향받지 않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기를 빼서 건조해진 사고, 부피가 얇아진 사고, 생략된 엉성한 사고, 여기서 연상되는 것이 비인간화, 인간 기계화, 인간성의 압사 혹은 박제품, 과장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 우리는 지금 그것을 예감하며 황량한 기계문명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교육제도의 개혁이 촉진되고 인성교육을 부르짖고 있는 것도 그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창조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은 풍요하게 자유롭게 생각하는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창조란 어디서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암중모색에서, 보이지 않는 곳, 확실치 않은 것을 향한 추구와 탐험에서 새로움은 싹트는 것이며 이미 되어진 곳, 즉 틀 속에서는 복제품만이 가능해진다. 모르는 것, 보이지 않는 곳은 사사오입을 당해버린 부분이지만 측량할 수 없는 그러나 실존하는 세계인데 논리가 서지 않는다 하여 인정치 않으려는 이성이야말로 교만한 자가당착, 모순에 빠져 있다 할 것이다. 인위적 모순은 깨야 하고 미지로 향하는 것이 창조의 출발이다.

일상적인 비근한 것에서 떠난 뒤 모순을 생각해보면 논리의 왜소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선 공간의 확대, 그러니까 틀이 없다는 것에서 우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고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다는 모순은 막다른 곳인 동시에 규명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님에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규명할 수 없고 막다른 곳이며 선택할 수 없다. 막연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게 작용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끌어들일 수 있고 어떠한 것도 끌어낼 수 있다는 구심력과 원심력 역시 모순인데, 그러나 지구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주공간에 떠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생명 일체는 공동체인 동시에 개체라는 것도 그렇다. 그것은 생명의 갈등이며 역사의 갈등이다. 한 몸 속에 다른 것과 합치려는 안타까움이 있고 다른 것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몸부림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소속감은 사랑일 수도 권력지향일 수도 있지만 외로움에서 탈출하려는 소망으로서 의무와 자기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반대로 자유에 대한 갈망은 해방에 대한 욕구다. 그러나 외톨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한데 왜 그것은 갈등일까. 생명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며 그 어느 것도 완전치 못하고 규명이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에는 방종이 따르고 통제에는 억압이 따르고, 이 두 가지 원형질이 서로 교체되며 물결같이 곡선의 연속을 이루는 것이 역사 아니겠는가.

○흰색엔 가능성 무한

모순은 균형이며 긴장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데서 가능했으며 존재의 조건인 동시에 연속성과 삶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만일 모순이 없어진다면 논리는 완성될 것이며 언어도 피안에 도달하겠고 절대적인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낼 지 모르지만 완성은 끝이며 정지이며 소멸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늘까지 인간의 질서를 위해 광분해왔다. 논리도 그것을 위해 봉사해 왔으며 인간이 만든 연장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능력이다. 그러나 연장이 삶을 위한 도구일 수 있지만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일 수 있고 쾌적한 삶의 지속을 위하여 논리가 만든 틀이 반대로 인간성 말살의 폐단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어떠한 사물에도 양면이 있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절대시하고 선택의 자유를 말하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벌써 강요의 조짐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서양의 자유개념으로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며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 선명함인데 그것은 문명의 승리였으나 문화의 패배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동과 서의 구별없이 이미 보편화한 것이지만 본래 동양에서는 하나라는 확실한 것, 절대적인 것, 선택의 자유라는 인식이 매우 희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을 여러가지 면에서 느낄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의상에서 잠시 살펴볼 것 같으면 흰 색의 숭상을 들 수 있다. 흰 색은 투명한 상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색이며 투명을 보다 뚜렷이 지향해가는 것에는 갓이 있다. 투명하다는 것이 가벼움을 말할 수 있고 가벼움은 비상을 연상시키며 그 경계선이 희미하다. 넓은 치마, 옷고름, 갓끈 그런 것들도 날리는 특성이 있고 날린다는 것은 역시 가벼움과 투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어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비어 있는 것에는 채울 수 있고 채우고 비우며 들락거리는 융통을 뜻하고 그것은 전혀 틀을 형성하지 않는 우주 지향이라 해석할 수는 없을까.

우리들 의상에 나타나는 곡선의 선호도 그렇다. 직선의 단절감을 피하고 곡선으로 포용하려는 기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림의 여백에는 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종소리의 긴 여음 뒤에 오는 정적은 소리의 이어짐을 느끼게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모두가 희미한 상태, 경계가 없는 상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도 그것은 희미하다. 죽었다, 없어졌다가 아닌 돌아갔다 떠나갔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며 이어짐이다. 모순을 수용하는 것이다. 잘라내지 않고 토막내지 않는 데서 오는 우주적 일체감, 그것은 무한한 흐름이다.

○신의 이름으로 만행

인류에게는 일찍이 신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창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은 신이 그 모순 자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논리로 신을 죽이든 살리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무의미한 짓이다. 그러나 나는 신을 만들고 부수는 만행을 기억한다. 그것은 엄청난 생명을 작살낸 만행이기도 했다. 20세기를 질러온 나는 신국이다, 현인신이다, 확고부동한 절대자, 하며 터무니없는 것을 만들어놓고 일본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학살했는가. 신병이라는 이름을 걸고 성전이라는 기치 아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배를 채우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해방 후에도 절대라는 명제하에, 이념이 그 얼마나 무시무시한 쌍방간의 대립, 살육의 도구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본의 경우는 모순이든 논리적이든,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실리를 위한 방편이었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일종의 환상이었다. 불멸의 이론도 없거니와 현인신도 있을 수 없다. 그 없는 것을 위해 있었던 것은 오직 수난 뿐이었다. 세계 도처에서 아직도 그같은 허상을 위한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끝으로 서구이론을 도입하여 그 틀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문학계의 근심스런 현황에 대하여 지면이 모자라지만 간단히 스치고 가겠다. 사실 서양이론으로 무장한 것도 그렇지만 틀 속에서의 운동마저 정지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데 타성과 고착, 이런 상태는 정말 비관적이다. 일구월심 서양이론에 매달린 일부 이론가와 그것을 답습하는 후학들이 다음과 같은 포크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포크너도 그 쪽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독자가 포크너에게 헤밍웨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성공한 작가이며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없는 말을 쓸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나와 토머스 울프는 성공할지도 모르겠고 성공 안할지도, 그것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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