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작가따라 독특한 창작세계 구축/신파극 이인직 아닌 임성구가 1911년에 첫 테이프/윤백남·김진섭·서항석 등 극예술연 본격신극 정립/유치진·이해랑의 드라마센터는 실험극의 산실로「마당에서 극장으로」 우리나라 신연극은 극장공연의 시작이다. 동시에 연극수입의 시작이기도 하다. 처음 연극계파는 운동으로서의 신극(유학파)과 놀이로서의 흥행극(국내파)의 대립으로 생겨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연극이 사라졌을 뿐 순수연극과 상업극의 대립은 계속됐다. 60∼70년대 성장기를 거치며 내용이 다양해졌으나 극단별로 일정한 양식과 이념이 뚜렷이 정착돼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출가나 작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추세이며 이 계보도 불명확한 채 제 각각인 편이다. 연출가와 극작가를 중심으로 연극의 맥을 살펴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최초의 근대적 극장은 후에 원각사로 바뀐 협률사(1902년). 1908년 여기서 공연된 이인직의 「은세계」를 신연극의 시발점으로 여겨왔으나 실제론 창작창극형식이었다. 신파극은 일본전용극장인 경성좌에서 신발지기로 일하던 임성구가 1911년 혁신단에서 공연한 것이 최초이다. 여기서 김도산의 개량단·신극좌, 김소랑의 취성좌등이 분화했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국내파에 비해 문수성(1912년 창단)의 윤백남, 유일단(〃)의 이기세는 일본유학파. 공연내용은 일본신파를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구술로 극을 만들어내는, 미분화상태의 극작·연출가 겸 배우였다. 1920년대에 들어 신파계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전국으로 퍼졌고 1929년 최초의 가극단인 금성오페라단이 생겼다. 박승희를 주축으로 한 도쿄유학파의 토월회는 구성원을 바꿔가며 1920년대에 활동, 신극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본격적인 근대극의 정착시기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1931∼39)가 본격 신극을 정립한 본산이다. 연극계 중견인 윤백남 홍해성과 김진섭 서항석 유치진 이하윤 이헌구 장기제 정인섭 조희순 최정우 함대훈등 문학도로 구성된 일본유학파가 만든 단체이다. 체호프 톨스토이등의 작품과 당대 사회현실을 담은 유치진의 창작극을 무대에 올려 학생·지식층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무영 김광섭 등 많은 문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신파극과 악극 등 흥행극도 전성기였다. 신파극은 신극계열에 의해 저질로 평가절하되기도 했으나 35년 배구자 홍순언 부부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민간극장 동양극장에서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아 흥행에 성공했다. 작가 이서구, 연출가 박진 안종화와 극연에서 옮긴 홍해성등이 활동했다. 또 다른 갈래로 좌익계열도 생겨났다.
그러나 암흑의 1940년대에 들어서자 어용단체인 현대극장이 설립돼 군국주의이념의 충실한 대변자노릇을 했다. 유치진 서항석 함대훈 전옥 김양춘 등 극연 토월회 신파극 영화계 인사를 두루 포괄한 단체였다. 연극계를 떠난 인물은 동양극장의 작가 최독견 정도다.
광복 직후엔 함세덕 조영출(이상 극작가) 이서향 안영일(이상 연출가)등 좌파계열 연극인들이 조선연극동맹을 결성해 활동했으나 47년부터 위축되기 시작, 한국전쟁을 거치며 맥이 끊긴다. 민족주의계열로는 유치진 이해랑 김동원 등이 활동을 재개, 극단 신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극연출신의 유치진과 서항석은 연극동맹에 참여, 초대 국립극단장 취임 등 문제를 두고 대립이 있었다. 이해랑 차범석 림영웅으로 이어지는 유치진계열은 정통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극계의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서항석계열은 이진순 이원경 김의경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두 계파는 예술적 대립보다는 감정적 대립으로 인한 단순인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신파계열은 방송과 경쟁하며 위축돼 갔다.
침체의 50년대를 지나 60년대를 맞자 연극계는 세대교체와 동인제극단의 정착으로 활기를 띠었다. 50년대 후반의 제작극회(차범석 오사량 최창봉)로부터 부조리극을 선두적으로 소개한 실험극장(이기하김동훈윤호진), 극작가 중심의 산하(차범석 임희재 하유선), 민중(이근삼정진수),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가교(이승규김진태 박인환 최주봉), 광장(이진순문석봉), 프랑스유학파 자유(김정옥 이병복), 여인극장(강유정) 등이 설립돼 오늘에 이른다. 65년 시작된 연극아카데미의 극작워크숍에서 박조렬 윤대성 오태석 이재현 노경식 등 극작가가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런 발판 위에 70년대 연극은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극단수와 공연횟수, 관객이 크게 늘었고 「에쿠우스」(실험극장)를 기폭제로 소극장 장기공연이 정착됐다. 질적 성장도 눈부시다. 유치진 이해랑이 교육과 공연의 일체화를 목표로 설립한 드라마센터는 새로운 실험의 산실이 됐다. 미국서 공부한 신유학파면서 유치진의 아들·사위인 유덕형안민수가 「생일파티」(헤럴드 핀터 작) 「초분」 「태」(이상 오태석 작)를 연출, 비사실주의 맥의 충격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극작가 겸 연출가인 오태석 이윤택의 작업은 유덕형의 강한 이미지에 영향받은 바 크다. 허규손진책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맥은 탈춤등 전통연희극형식의 수용을 화두로 삼았다.
80년대엔 내용면에서 암울한 정치현실에 대한 도피와 저항, 형식면에서 마당극이 눈에 띈다. 서울대 연극반 출신의 정한룡 김석만 김광림 이상우등이 연우무대에서 현시대를 담은 창작극을 활발히 올려 호응을 받았다. 현재까지 박계배 김철리 등이 리얼리즘의 맥을 이으며 채윤일, 부조리계열의 기국서, 최근 복귀한 한태숙, 그리스비극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김아라 등이 활동중이며 최근 붐을 맞고 있는 뮤지컬계는 윤호진이 선두주자다.
흥행의 성공여부는 관객과의 교감을 확인하는 것이면서 지속적인 작품제작을 좌우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연극인들은 예술성과 재미거리 사이에서 방황을 계속한다. 신연극 도입초기의 갈등이나 방황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21세기를 눈 앞에 둔 우리 연극계의 과제는 한 연출가가 사라진 뒤에도 전수될 수 있는 연극양식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여배우들/신파극선 남자배우가 분장 대역/1927년 기생출신 김소진이 최초/토월회의 이월화는 뭇남성들 울려
창극이 아닌 신파극이 처음 막을 올릴 즈음 우리나라에는 여배우가 없었다. 혁신단 유일단 문수성등 초기 신파극단은 남자배우가 여자분장을 하고 역할을 대신했다. 일본고전극 가부키(가무기)의 전통을 본뜬 것이기도 하다. 이 극단들에서 여장배우로 날린 이들로는 고수철 안석현 이응수 최여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가녀린 몸매와 목소리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진정한 첫 여배우로는 1917년 개량단에서 데뷔한 김소진. 기생출신인 그는 창극과 신파에 두루 출연했으나 곧 영화계로 옮겼기 때문에 연극배우로서는 스쳐 지나간 인물이다. 두번째 여배우 마호정(마호정)은 취성좌의 김소랑과 결혼, 극단 부대표와 자금담당으로 일했던 여걸이었다. 악녀역을 즐겨 했고 유순한 여주인공역은 앞의 최여환이 계속 맡곤 했다.
한편 토월회의 이월화는 연극 영화사상 최초의 인기스타였다. 박승희가 여배우를 구하려고 여학생 기생 창녀들을 찾아다닌 끝에 뺨까지 맞아가며 발굴한 인물이 바로 이월화였다. 미인이고 섬세한 그는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고관의 서녀로 알려진 이월화는 출생연도, 본명이 불명확했으며 성장과정도 불우했다. 그는 약혼녀가 있는 박승희를 짝사랑했으나 좌절하자 남성편력과 폭음으로 지내다가 서른 안팎의 나이에 자살했다.<김희원 기자>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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