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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의「살구꽃은 소리없이 진다」·박현의「회색 눈보라」(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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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의「살구꽃은 소리없이 진다」·박현의「회색 눈보라」(소설평)

입력
1996.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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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감동과 황량한 이야기「창작과 비평」 창간 30주년 기념 신작소설집으로 출간된 「작은 이야기 큰 세상」에는 모두 1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런데 등단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 이 작품집에서 맨 끝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두 편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그 양자 사이에서 자못 흥미로운 대비가 발견된다.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실려 있는 「살구꽃은 소리없이 진다」(이상권)는 요즘의 소설들에서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따뜻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농사를 짓다가 조합빚을 갚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후 채소, 과일행상을 하며 살아가던 부부가 10년만에 고향을 찾아와 옛 이웃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기둥줄거리이거니와, 이러한 기둥줄거리에서나, 또 그 기둥줄거리를 에워싸고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나 우리는 한결같이 따뜻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파괴되어 가는 모습은 이 작품 속에도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비극적인 울림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그러한 측면을 결코 경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독자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비극적인 울림을 넘어서는 따뜻한 감동인 것이다. 그 감동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유대에 대한 신뢰이며 인간의 에로스를 일깨워 주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신뢰이다(그 자연의 생명력을 인상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존재가 「살구꽃」이다).

이에 비하면 맨 마지막 자리에 실려 있는 「회색 눈보라」(박 현)는 정반대의 극단을 보여준다. 20세기가 끝나는 몇 년 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해서 세 명의 30대 남자가 하루 저녁을 보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황량함」이다. 빵집 주인, 기자, 교사라는 안정된 신분을 갖고 있는 세 남자는 그 중 한 사람이 평소 잘 알고 지내 온 이웃집 개를 훔쳐서 잡아먹는가 하면 얼핏 스쳐보기만 한 여자 한 사람과 성관계를 맺어보려는 목적으로 한꺼번에 그 여자의 집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이처럼 황량한 삶의 행태에 어울리게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도 삭막하고 냉소적인 것 일변도이며, 작품 전체의 문체 역시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런가 하면 작품 속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땅에 쌓이지도 않고 모래먼지처럼 흩날리는 회색 눈보라」 또한 이러한 황량함과 잘 어울리며, 더 나아가서는 그 황량함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주는 두 편의 소설은 그러나 각자가 속한 영역에서 상당한 수준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두 편의 소설을 대비해 보면서 우리 소설의 현주소와 미래에 관하여 많은 유익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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