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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2/양화(한국의 예맥: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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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2/양화(한국의 예맥:9)

입력
1996.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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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 선전참여싸고 대립/이젠 서울대­홍대파로 양분/“개성 추구” 화맥형성못하고 출신등 파벌화/최초유학 고희동·첫 누드 김관호 선구/서울대 김병기,홍익대 진환 등이 개척근대한국화가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산수화를 뿌리로 사제간의 끈끈한 연을 통해 전수되고 그 개념과 영역이 확대돼 온 것과 달리 양화는 20세기초 일본에서 직수입돼 각개 약진을 통해 발전했다. 한국화가 전통을 중시하는데 비해 양화는 아방가르드정신에 따라 개성창출을 추구하는 점에서 기본정신이 다른데다 부유층 자제들의 일본유학붐을 타고 들어온 양화계에 화단의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제관계를 통해 전승되기보다 출신과 이해관계에 따른 경쟁(때로는 대립)을 통해 자리잡았다. 도입초기 도쿄미술학교출신과 일본사립학교 출신의 대립을 비롯, 선전(조선인전람회) 참여파와 비참여파, 국전파와 반국전파, 서울대파와 홍익대파 등으로 나뉘어 벌어진 주도권다툼은 갈등과 반목으로 치달아 화단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관학파를 이끌었던 인물은 춘곡 고희동(춘곡 고희동). 본래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에게서 수묵화를 배운 그는 1915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화협회(1918년), 고려화회(1919년) 창설, 선전(1922년) 주도, 국전신설(1949년) 등을 통해 국내화단의 틀을 잡았다.

춘곡에 이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동우 김관호는 1916년 「석모」라는 작품으로 수석졸업, 화가지망생들의 우상이 됐다. 평양 능라도 부근에서 두 여인이 뒤돌아서 목욕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누드화로 일본 최고명예의 신인등용문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 도쿄예술대학에 영구소장됐다. 같은 해 평양에서 최초의 양화개인전을 열었던 그는 도쿄미술학교 동문인 유방 김찬영, 설초 이종우(설초 이종우)와 함께 1925년 삭성회회화연구소를 설립, 후진을 양성했다.

1930년대 들어 화단은 일제가 주도하는 선전참여를 싸고 둘로 갈리었다. 춘곡과 동우에 이어 선전에서 각광을 받았던 인물은 운봉 심형구, 김인승, 청정 이인성, 철마 김중현등. 운봉과 김인승이 도쿄미술학교출신의 엘리트작가인데 반해 청정과 철마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독학작가. 특히 청정은 대구화단의 대부이며 수채화의 개척자인 소허 서동진의 문하생으로 17세때 입선한 이후 연6회 특선, 25세에 추천작가가 됨으로써 선전이 낳은 최고의 작가로 기록됐다. 선전 반대세력의 대표단체는 1928년 유럽에서 귀국한 설초가 앞장서 조직했던 목일회. 구미유학파인 우석 장발(미 시카고미술학교와 예일대), 임파 임용련(미국 예일대)과 설초의 제자인 청구 이마동, 근원 김용준(이상 도쿄미술학교), 서산 구본웅(태평양미술학교), 길진섭 등이 이 단체에 참여했다. 또 일본의 사학파로 새로운 화면질서를 추구했던 수화 김환기(일본대) 유영국 이중섭(이상 문화학원) 등이 동참했다. 서산은 곱사등이라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국내야수파의 1인자, 수화와 유영국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또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임파의 지도를 받았던 이중섭은 피카소, 마티스의 화풍과 향토성 짙은 주제의식을 결합한 명작들을 남겼다.

해방후에는 미술대학 설립, 미술단체 결성,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개최등으로 미술계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미술인들의 이합집산이 두드러졌다. 서울대 미대는 우석과 유방의 아들로 미술이론에 밝았던 김병기,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근원 등이 중심이 됐다. 문학진 김창렬 윤명로 이우환등이 당시 그들의 지도를 받았다. 홍대는 향토성 짙은 작품을 즐겨 그렸던 진 환, 설초와 청구, 이병규 등이 주축이 되고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출신인 불재 윤효중과 수화가 가세하면서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서울대파와 홍대파의 대립은 대한미술가협회 위원장선거를 계기로 심화하면서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로 대물림됐다. 세력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전심사위원 선정을 싸고 격렬한 다툼이 이어지면서 반국전운동을 벌이는 세력이 생기고, 이념과 화풍을 명분으로 내세워 계파의 이익을 지키려는 단체가 난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단의 이해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으로 뚜렷한 맥을 형성하거나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작가로는 오지호, 박수근, 최영림 등이 돋보인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이었던 오지호는 창씨개명 거부로 일본경찰에 쫓기다가 광주에 정착, 남도화단의 정점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조국의 산하를 19세기 인상파화풍으로 재구성했던 그가 『회화는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백』이라며 『비구상미술은 회화가 아니다』라고 공박했던 구상회화선언은 구상미술의 주춧돌이 되었다. 오승우 최쌍중 강길원 황영성씨 등이 그의 제자이다. 독학으로 선전에 입선했지만 기득권 작가들 사이에 끼여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박수근은 화강암표면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질감효과 위에 소박한 한국인의 정서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화가 사제관계를 통한 화맥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도입초기에는 초보적 기법의 답습수준을 넘지 못해 독특한 자기양식이나 깊이있는 예술정신을 표출하는 대가들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능한 신인들이 중견으로 성장, 2세를 지도할 수 있는 연조가 돼서는 파벌싸움으로 인해 화풍을 전수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도 했다.

올해는 춘곡이 양화를 선보인지 81년째 되는 해. 현재 20여개의 미술대학에서는 한국화와 양화 전공자들이 매년 1,500여명씩 배출되고 있으며 미술협회 소속작가만 1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화단은 아직도 서울대파와 홍대파로 양분돼 선의의 경쟁보다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으며 각종 공모전의 입상과 관련해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1세기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편가르기를 지양하고 잠재력 있는 신인을 발굴, 세계적 예술가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관립 도쿄미술학교 출신들/고희동 등 배출 한국근대미술 산실로/한국인 1∼2명 입학허용 40여명 졸업

일본 최고권위의 미술교육기관이었던 관립 도쿄미술학교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산실이기도 했다. 1889년 정통아카데미즘의 화풍을 지향하며 설립된 이 학교는 한국화단을 장악했던 주요 작가를 배출했고 후에 일본인동문들이 선전의 심사위원을 맡음으로써 작품경향, 기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당초 일본화와 조각·공예분야(정원 50명)만 있었으나 8년뒤인 1897년 서양화과가 신설됐다. 교수진은 구로다 기요데루(흑전청휘)등 당시 일본화단을 움직이던 쟁쟁한 작가들. 서양화과 정원은 35명으로 한국인학생은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책에 따라 한해 1∼2명 입학이 허용됐다. 현재 도쿄예술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이 대학의 졸업생명부에는 고희동(1915년) 김관호(1916년) 김찬영(1917년)에 이어 이종우 김창섭 공진형 장 발 이병규 도상봉 박광진 김호룡 신용우 황술조 강신호 오지호 김용준 김인승 심형구 김흥수등 40여명이 올라 있다. 1940년 입학한 마지막 한국인졸업생 김흥수 화백에 따르면 이 학교의 예비학교인 가와바타(천단)화학교에서는 한국유학생 20여명이 시험준비를 했고, 어떤 사람은 10년이나 재수를 했다. 1930년에는 한국인재학생 졸업생들이 동문 신미술운동그룹인 「동미전」을 발족, 1932년까지 양화, 도안, 공예등의 작품을 전시했다.<최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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