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평론 정착시킨 “고집의 세월”/발행인 조동화씨 사재팔아 운영국내 유일의 무용전문 월간지 「춤」이 3월호로 발간 20주년을 맞는다. 전세계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는 무용월간지. 스무해동안 한 회도 거름이 없었던 「춤」지는 이 땅에 무용평론을 정착시키고 무용의 위상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작은 구판판형과 세로쓰기, 창작춤과 안무가중심의 기획등은 춤지가 고집해온 특징이다.
발행인 조동화씨(74)는 50년대에 이미 무용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나 스스로 『글 쓸 줄 아는 무용관객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76년 잡지를 발행한 뒤부터 비로소 무용평론이 정례화했고 명실상부한 무용평론가를 배출해 냈다. 이순열 김영태 채희완 김태원 김채현 이종호 김경애씨 등이 그들이다. 함북 회령출신이어서 사투리억양이 묻어나는 말투로 『인터뷰할 거이 뭐 있어요』라며 한사코 사양하던 조씨도 이 부분만큼은 자랑스럽다. 초창기인 70년대에 평론으로 인한 법정시비나 춤지 발행취소서명운동 등을 겪은 후라 더욱 그렇다.
조동화씨가 「춤」을 발행하게 된 것은 75년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후 『이제 쫓겨나지 않는 직장을 만들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춤이라면 향수어린 추억도 많다. 첫 인연은 47년 함귀봉무용연구소. 46년 24세의 만학도로 서울대 약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생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예쁜 여학생들 생각에』 연구소 문을 두드렸다. 그때 동기생으로는 원로극작가 차범석씨, 전문화방송사장 최창봉씨, 연극평론가 김경옥씨 등이 있다.
다분히 딜레탕트적인 취향으로 시작한 춤전문지의 발행은 그러나 고난과 시험의 길이었다. 처음엔 조씨가 차값을 아껴 모았던 골동품 미술품 등을 하나씩 팔아야 했고 최근엔 광고가 꽤 늘었지만 유가부수는 여전히 400부(발행 1,600부) 뿐이다. 『춤지 때문에 좋아하던 물건을 많이 잃었어요. 한달치 원가가 35만원 쯤 할 때였어요. 가지고 있던 박수근 그림을 팔아 두 달을 때웠죠』 창간 10주년을 맞아서는 폐간사를 쓰기도 했다. 다행히 독지가친구가 빚을 청산해 주었다. 『근데 참 이상하죠. 재산보다도 책 한 권이 또 나온 걸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지금 그는 서울종로구 동숭동의 10평짜리 세모꼴 사무실, 늘어가는 책들로 더욱 비좁아지는 사무실을 아늑하다고 느낀다. 우편봉투를 뒤집어 춤지 발송에 쓰는 일이 그가 그 좁은 공간에서 즐기는 「가난의 취미」다.
『아무것도 예상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좋아서 한 일일 뿐이죠. 그런데 말이죠,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면 그 보답은 더욱 값지게 오더군요』 <김희원 기자>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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