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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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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장명수 칼럼)

입력
1996.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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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연휴를 보내고 나면 대부분의 주부들에게 몇가지 증세가 나타난다. 첫째는 주부습진, 둘째는 가벼운 우울증이다. 며칠동안 고무장갑을 끼고 부엌일을 하다 보면 손에 습진이 생기고, 손님맞이등으로 과로한 나머지 심신이 지쳐서 기분이 가라앉게 된다.특히 설날같은 때는 지난 날들과 앞날을 생각하며 공연히 우울해지기 쉽다. 나는 어떤 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그동안 왜 그처럼 부족했으며, 왜 그런 잘못들을 저질렀을까. 앞으로는 또 어떤 생을 살게 될까…. 세월앞에서 가슴이 뛰던 젊은날이 지나면 세월은 벅차고 덧없고 암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앞으로 좋은 일은 적고, 나쁜 일은 많으리라고 어둡게 전망하는 것도 나이든 사람들의 특징이다.

설연휴의 마지막 날 나도 그런 기분에 잠겨 손을 만지고 있었는데, 『지금 TV 틀어봐. 곧 「인생」시작할거야』 라는 친구의 전화가 걸려 왔다. 김수현씨가 쓴 「인생」은 언젠가 명절연휴에 특집극으로 이미 방영되었던 작품인데, 그때 놓친 것을 몇몇 친구들이 아쉬워 했었다.

「인생」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그 자녀들의 이야기다. 한평생 헌신적으로 가족을 뒷바라지하며 엄격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어머니는 치매가 악화하면서 추악하고 위험하고 이해할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가족도 몰라보고, 손자의 방에 대소변을 보고, 이불에 불을 지르고, 집을 뛰쳐나가 택시를 타고 젊은 시절 행복하게 살았던 조치원으로 가자고 한다. 아들과 며느리와 딸들은 어머니 때문에 괴로워 하고, 싸우고, 매일 시달려 기진맥진 한다.

마침내 자녀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된 어머니, 한평생 닦아온 인격이 철저하게 파괴된 어머니, 누구도 그 잔인한 변모를 납득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자동차에 실려 요양원으로 간다. 마지막 생을 향해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그는 달려간다.

설연휴의 마지막 날 「인생」을 보고 울면서 가족과 인생과 세월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 옛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추위속에서 명절준비를 하던 어머니와 할머니, 드라마속의 그 어머니도 설을 보내며 우울증과 주부습진을 겪었겠지 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충분히 울고 났더니 기분이 산뜻해 졌다는 친구도 있었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설 기분, 그것이 나이먹는 맛인가 보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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