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옹호활동 앞장선 “꼿꼿한 법조인”/작년엔 현사법부 질타 글 실어 파문도18일 타계한 이범렬 변호사는 군사독재시절인 71년 법관 150여명이 사법권독립을 요구하며 집단사표를 냈던 이른바 「1차 사법파동」의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였다.
사법파동의 발단은 71년 7월28일 새벽 서울지검 공안부가 뇌물수수혐의등을 걸어 당시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부장판사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데서 비롯됐다. 이판사에 대한 범죄사실은 반공법위반사건의 증인신문을 위해 제주도에 출장갔을 때 변호인측으로부터 왕복여비, 숙박비등 9만7,000원의 금품과 향응을 받았다는 것.
그러나 판사들은 이를 법원이 박정희정권을 비난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서울대생 10명과 월간 「다리」지필화사건 관련피고인들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데 대한 정권적 차원의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현직판사에 대한 검찰의 이같은 전례없는 영장청구는 서울형사지법이 이부장판사등에 대한 두차례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한뒤 사법사상 초유의 법관집단사표사태로 번졌다. 서울민·형사지법 판사 83명이 『검찰의 태도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하는 처사』라며 「사법권수호결의문」을 발표하고 집단사표를 낸 것을 시작으로 전국법원판사 455명중 150여명이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결국 이 사태는 영장청구와 관련된 검사들의 인사조치로 수습됐지만 검찰관계자 인책을 요구했던 강경파 법관들도 법복을 벗거나 훗날까지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부장판사도 같은해 9월 『「가르마같은 외길」을 따라 종신하려 했다』던 뜻을 꺾은채 법복을 벗고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변호사는 그뒤 한국일보 「시평」을 비롯, 신문과 잡지에 날카로운 시론을 기고하면서 적극적인 인권옹호활동을 펴왔다. 지난해 9월에는 대한변협 기관지 「인권과 정의」에 『사법부가 행정부에 재판의 장만 빌려주는 대여업자로 전락했다』는 요지로 현재의 사법부를 질타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실어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변호사는 지병인 식도암이 악화한 최근까지도 살부교수 김성복 피고인의 변론을 맡는등 변호사로서의 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변호사의 빈소에는 함께 법관생활을 했던 김덕주 전 대법원장, 이회창 전 대법관, 김진우 헌법재판소재판관, 오성환 변호사등이 찾아 「꼿꼿한 법조인」으로서의 고인을 추모했다.<김승일 기자>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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