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소 수용초과 즉결처분 예사로/기혼죄수 강제이혼·면회는 연 1회/재범자 재판없이 수감·사회안전원 온갖 비리/사회복귀후에도 갈곳없어 체제불만세력 변화90년 10월 북한 교화소(교도소)중 유일하게 여성죄수 수용시설을 갖춘 평남 개천교화소. 2층 공장 건물이 사방을 둘러싼 운동장에 남녀 죄수 6천여명이 발디딜 틈없이 모였다.
곧 이어 사회안전원 2명이 30대 죄수 1명을 끌고 나와 쇠기둥에 몸을 묶고 죄명을 낭독했다. 당정책에 불만을 품고 노동을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운동장 주변에는 기관총을 든 안전원들이 4∼5m 간격으로 도열해 있었다.
87년 11월부터 92년 12월까지 개천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이순옥씨의 증언.
『김씨라는 것만 기억난다. 그는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직장을 다녔다. 어느 날 백화점 앞을 지나다 「도둑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건물밖으로 도망치는 도둑을 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했다. 살인죄로 교화소에 들어온 김씨는 10㎞ 떨어진 탄광에서 일하며 억울함을 주변에 호소했다. 당원자격을 박탈당해 희망이 없다며 안전원에게 죽여달라고까지 말한게 화근이 됐다. 당정책을 전면 부정했다는 것이다』
○시신보도록 강요
김씨는 동료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죄수들은 각자 작업장으로 돌아가면서 김씨의 처참한 시신을 쳐다 보도록 강요당했다.
북한은 정치범 수용소는 물론 교화소에서도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북한은 교화소내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개 처형을 서슴지 않고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각 도마다 설치된 교화소에는 수용능력의 4∼5배가 넘는 죄수들이 수용돼 있다. 죄수들은 하루 18시간의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보다 훨씬 적게 배급되는 식량으로 연명해야 한다.
이순옥씨는 수감기간에 공개 처형을 7차례나 목격했다. 김씨를 포함, 남자가 6명이었다.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9년 8월 처형된 평남출신의 최월련씨(당시 39)는 남매를 둔 가정주부였다. 이씨는 『처형장면을 목격한 교화소 신입자중 7∼8명은 충격때문에 정신분열증에 걸리곤 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교화소는 공장을 갖고 있다. 제화 포화(천신발) 재단 피복공장등이 주종을 이룬다. 개천교화소도 예외는 아니다. 죄수들은 상오 5시에 기상, 하오 11시까지 18시간동안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 죄질이 나쁜 남성 죄수들은 교화소 북쪽 10지점에 있는 탄광촌에 투입된다.
식사시간은 끼니당 10분정도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작업장 밖 복도 시멘트 바닥에 앉아 엄중한 감시속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죄수들에게 공급되는 식사는 하루 3백g 정도로 일반 시민의 절반수준에 불과하다. 이순옥씨의 증언.
『매일 아침 작업량이 할당되는데 작업량을 채우지 못한 죄수는 배급량을 깎인다. 작업량을 계속 채우지 못하면 끼니당 20g씩 배급을 줄인다. 나중에는 독방에 가야 하는데 독방 수감자는 하루 90g, 즉 끼니당 30g의 식사가 제공된다. 반찬은 배추잎 몇개가 떠있는 소금국물이 전부다』
죄수들은 반(3백∼4백명) 조(30∼40명) 분조(4∼7명)로 나뉘어 관리된다. 작업중 화장실은 하루 3차례, 그것도 분조단위로 움직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죄수들이 감방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하오 11시께. 감방 한쪽 켠에 마련된 신발장에 신발을 넣은 뒤 가로 세로 각 5m, 3m 크기로 그려진 흰색 선안에 정렬한다. 죄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야 하며 손을 무릎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안전원이 감시구 문을 열면 감방장 구호에 따라 번호를 선창하며 인원점검을 받는다. 이불은 포단(솜이불) 16개가 전부이고 스팀시설은 있지만 가동이 끊긴지 오래이다.
평남 개천교화소 여자감방의 경우 40㎡크기의 감방 26개가 있다. 원래 정원은 20명이지만 교화소측은 감방당 죄수 80여명을 수용하고 있다. 취침시간중에도 죄수들은 2명씩 돌아가며 불침번을 선다.
죄수들은 하루 수면시간이 4∼5시간에 불과, 심한 영양실조와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한달에 2차례 있는 휴일에도 사상학습등이 계속돼 휴식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이순옥씨의 계속되는 증언.
『좁은 공간에 80여명이 자려면 옆으로 몸을 세워 자야 한다. 머리를 벽쪽으로 향하고 두 줄로 눕는데 반대편 죄수의 발이 가슴에 오도록 하고 잔다. 잠을 자다 턱을 차인게 한 두번이 아니다』
교화소는 외곽이 7∼8m 높이의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남녀 수용지역 중간에도 7∼8m의 담장이 설치돼 있다. 그 위에는 전기 철조망이 설치돼 있고 죄수들을 감시하는 6개의 망루가 있다.
죄수들이 교화소내 작업장과 감방으로 가려면 4m 높이의 철문 2개를 통과해야 한다. 죄수 수용시설과 정문 사이에는 교화소 관리사무실과 안전원 숙소, 물자 창고등 부대시설이 들어차 있다.
○출소전 순화교육
남녀 죄수 가운데 기혼자는 대부분 이혼을 당한다. 교화소에 수감되면 맨 먼저 이혼장 서류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남아있는 식구라도 수용소에 가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최후의 수단이다.
죄수들은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사회안전부가 배치한 협동농장등에서 일을 하지만 주위의 냉대와 외로움으로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이순옥씨는 교화소 생활을 전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김일성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내려진 대사령에 따라 92년 1월 개천교화소에서 8백여명의 여성죄수들이 석방됐다. 그러나 5∼6개월뒤 그중 절반인 4백여명이 교화소에 재수감됐다. 재범자는 재판없이 재수감된다. 그들은 협동농장에 가더라도 기거할 곳이 없어 남의 집 헛간에 얹혀 지내는게 보통이다. 숟가락 밥그릇등 기본적인 생활도구조차 없어 생활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배가 고파 옥수수나 과일을 훔쳐먹는 절도범죄가 대부분이다』
출소하는 죄수는 15일동안 「만기방」에 따로 수감돼 순화교육을 받는다. 죄수들은 교화소 생활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과 이를 어길 경우 즉시 재수감될 것임을 경고받는다. 또 당정책, 김일성 김정일 교시내용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죄수들에게 면회는 규정상 1년에 두차례 허용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1년에 한번 정도 면회가 가능하다. 면회도 1대1이 아닌 다대다 형식으로 이뤄지고, 면회시간도 안전원들의 감시아래 단 10여분에 불과하다.
교화소를 운영하는 사회안전원들은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물자 빼돌리기에 혈안이 돼있다. 사회안전원들은 옷감을 빼돌리기 위해 죄수들에게 여백없이 촘촘하게 옷감을 재단할 것을 수시로 요구한다. 이순옥씨는 『양복 1백벌을 만들 수 있는 옷감 5백를 할당 받아 위탁물량을 재단하고 나면 30% 정도가 남는다』며 『이 때문에 기계재단외에 손재단을 해야하는등 죄수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교화소는 죄수들의 교정·교화기능을 상실했다. 사상범이 아닌 일반 죄수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이들을 오히려 체제 불만세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교화소내의 비인간적 대우는 단기적으로는 북한사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결국 체제붕괴의 한 요인이 될 것이라는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교화소 어떤곳인가/절도범 등 수용 “인권사각지대”/사회안전부 산하 도마다 1곳씩 운영/고문·중노동 등 정치범수용소에 버금
북한주민들에게 교화소는 정치범 수용소와 함께 공포의 대상이다. 한번 교화소에 수감되면 북한 사회에서 영원한 낙오자가 된다. 또 가혹한 노동량과 굶주림, 본보기식 공개 처형 등은 인권의 사각지대로 죄수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든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화소는 사회안전부 지도아래 각 도마다 1개씩 운영되고 있다. 죄수들은 사회안전부가 정한 교화소 준칙대로 생활해야 한다.이를 어길 경우 총살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순옥씨가 전하는 평남 개천교화소의 교화생활준칙을 보면 북한은 일반 죄수도 「사상적 결함이 있는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의 위신과 권위를 목숨걸고 보장하는데 적극 참가한다 ▲징벌노동으로서 사상을 개조한다. 죄수는 일별 월별 분기별 노동과제를 무조건 성실히 수용한다 ▲국가와 사회의 재산인 설비를 눈동자같이 관리한다. 국가설비나 자재를 파손하거나 고장낼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죄수는 말하거나, 소리내어 웃거나 하지 않는다.
교화소를 운영하는 사회안전부는 중앙조직―도안전국―군안전부―분주소 등으로 짜여져 북한 주민의 일상 생활을 빈틈없이 감시한다. 일단 죄를 지은 북한 주민은 사회안전부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범죄의 종류와 경중에 따라 처리가 다르다.
절도 소매치기 풍기문란사범 등은 사회안전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노동을 통해 사상을 개조한다. 이중 죄질이 나쁜 경우는 교화소로 보내진다. 반면 국가기관에서 일하다 죄를 지은 범죄피의자는 강제노동집결소로 보내진다. 다만 강제노동집결소에 가기 전에 죄를 인정하면 재판없이 형이 확정돼 교화소로 보내진다. 따라서 강제노동집결소로 가는 범죄피의자는 대부분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원칙대로라면 범죄피의자는 강제노동집결소에서 사회안전부 조사를 받고 구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은 뒤 형 확정 절차를 거쳐 교화소로 가게 된다. 문제는 국가기관에서 일하다 사상적으로 죄를 범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북한 주민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제노동집결소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교화소에 수감되면 북한 주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기본적 권리는 모두 빼앗기게 된다. 탈북자들은 교화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사법부의 재판보다 우선하는 사회안전부의 즉결 처분에 더욱 심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 사회1부기자
김병찬 정치2부기자
김관명 사회1부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