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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월급은 암시장 비누 2장값”(육성증언/북한은 지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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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월급은 암시장 비누 2장값”(육성증언/북한은 지금:4)

입력
1996.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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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양 반만배급 “쌀­강냉이 1대 9”/“군량미다 뭐다” 온갖 구실 다 떼여/사정 좀 낫다는 군조차도 영양실조병사 속출/생계 막막… 중국 친척통한 혼인청탁도 늘어북한 주민들의 그렇지 않아도 궁핍한 삶은 지난해 수해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식량과 생필품은 근근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만 배급되고 있고 어린이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당·군·관의 상당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빼돌리거나 뇌물로 축재, 기층 인민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가재도구나 생활 필수품을 암시장에 팔아 연명하고 있으며,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주민 1인당 식량 배급량은 명목상으로는 60년대나 지금이나 7백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서면서 군량미 비축을 이유로 한달 배급량중 4일치를 제외하기 시작했다. 80년대부터는 나머지 부분중 10%를 제외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식량을 수송하는 도중 유실되는 양(수송도중 감호)과 도정과정에서 감해지는 부분(도정감량)을 주민몫에서 떼낸다. 탈북자들은 지난해 7, 8월 수해를 입은 평안남·북도, 자강도, 황해남·북도 지역에서는 규정량의 절반 정도만 배급되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귀순한 이순옥씨(49)는 『군량미등을 제외하고 실제 배급받는 식량은 1인당 하루 5백65서 5백80으로 끼니당 1백90정도를 먹는 셈』이라며 『그나마 쌀과 강냉이의 비율은 1대9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군부대는 일반인보다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지만 배가고프긴 마찬가지이다. 군관(장교)과 하전사(사병)의 하루 배급량은 8백이다. 대대급 이상 군지휘부의 군관등은 7백이다. 활동량등을 감안해 책정한 것이다. 그러나 배급량은 언제나 모자란다. 식량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귀순한 최주활씨는 『쌀이 중대 단위까지 내려오는 동안 30% 가량이 옆으로 빠져 나간다. 사단은 사정없이, 연대는 연대해서 해 먹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전했다.

안영길씨의 증언.

『군에 쌀을 배급하는 양정사업소에서 출고되는 쌀중 5% 정도가 새나가고 있다. 식량보급 관련 담당자들이 떼먹기 때문이다. 각급 부대 군관들도 부대에 도착한 쌀을 횡령한다. 부대장의 경조사등에 쓸 쌀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는 하전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의 5∼6% 정도가 영양실조 상태라는 것이다. 이들은 병원시설이 모자라 각 부대에서 요양하는데 1개 중대(1백∼1백20명)당 5∼6명이 몸무게가 34㎏이하로 내려가 영양실조 후유증중 하나인 괄약근 조절능력 상실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최주활씨는 『1, 2, 4, 5군단등 최전방 군단에 특히 영양실조 증세를 보이는 하전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군관들도 배급량이 줄어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80년대만 해도 군관들에게는 매월 계란 40개가 지급됐다. 그러나 90∼92년에 20개로, 93년부터는 5개로 80년대의 8분의 1수준으로 줄었다. 최주활씨는 『1년치 군량미 비축분은 머리에 베고 죽더라도 사용하지 말라는게 당의 절대 엄명』이라며 『대부분의 군관 가족들이 저녁식사를 죽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소의존 식량 끊겨

북한의 식량난은 80년대 들어 계속된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서 악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92년 대동강 범람등 계속된 홍수로 곡창지대인 서해안 지역이 북한 주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구소련등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연쇄 몰락은 식량 및 연료의 상당량을 이들 국가에 의존하던 북한에 치명타를 가했다. 때문에 북한의 식량사정은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자립경제노선을 걷고 있는 북한 사회의 구조적인 경제난에다 가뭄 홍수등 천재까지 겹쳐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는게 탈북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국제적십자등 구호기관 관계자들도 수해복구 능력이 전무 하다시피 한 북한에서 식량난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북한 농촌 주민들은 도시 노동자보다 그나마 식량사정이 나은 편이다. 배급이 시원치 않자 개 돼지등 가축을 사육하거나 야채를 재배하고 강냉이등을 몰래 경작하는 등 「생활투쟁」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주활씨는 『함경도등 산골이나 어촌 농촌이 먹고 사는데는 괜찮은 편』이라며 『도시 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사를 짓지도 않는 군·읍 단위의 주민들이 식량난에 가장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이나 군·읍 단위 주민들은 생활 필수품이나 가재도구등을 들고 농촌으로 나가 식량과 맞교환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옥씨는 『청진시에서 낡아 빠진 라디오등을 들고 온성군으로 와 옥수수 감자등과 교환해 가는 도시 노동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공급물량은 적고 수요는 많자 밀매되는 식량과 생필품 가격도 크게 올라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더욱 옹색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40∼50원선. 북한 인민군 대좌였던 안영길씨는 월 1백47원, 상좌였던 최주활씨는 1백90원 정도를 받았다.

북한 공식환율에 따르면 1달러가 2원이므로, 일반 노동자들은 월 20∼25달러를 벌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월급은 60년대에 비해 3배 정도 오른 반면 밀매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최주활씨의 증언.

『92년 7원이던 강냉이 1㎏은 93년 15원, 94년 30∼40원, 95년 50∼60원에 암거래되고 있다. 또 94년 7월까지 1백50원하던 닭은 2백50원에 달한다. 마른 오징어는 13원, 빨랫비누는 1장에 20원, 콩기름은 한 병에 30∼40원을 호가하는데도 없어서 못 산다. 4인 가족이 한달치 먹을 채소를 사려면 암시장에서 최소 3백원이 필요하다. 원래 국영상점에서 파는 쌀은 1㎏에 8전(1백전이 1원), 된장 간장은 1ℓ에 50전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물건이 없다』

밀매 성행으로 북한 사회에 뇌물이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밀매를 하다 걸리면 교화소등에 보내져 가족과 영영 이별함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장된다. 사회안전원등에게 적당히 눈감아 줄 것을 부탁하며 뇌물을 주는데, 밀매거래자들이 늘자 액수도 커졌다. 『교화소에 들어온 죄수들을 보면 초범인 경우가 많다』고 전한 이순옥씨는 『크게 해먹는 사람들은 최고 1만원까지 뇌물을 바치고, 이들은 걸려도 담당 사회안전원이 빼준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은 북송 재일교포들을 「쪽바리」라고 멸시해 왔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의 친지들이 북송 재일교포들에게 보내는 생필품 때문이다. 북송 재일교포들은 일제 전자제품이나 양복등을 암시장에 내다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 양복은 한벌에 2천∼3천원에 거래된다.

중국에 조선족 동포들을 둔 주민들도 일반인보다는 그나마 생활이 나은 편이다. 비록 중국정부가 지난해 9월 북한으로 식량반입을 금지 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식량밀반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의 친지로부터 받은 생필품을 머리에 이고 보따리 장사에 나서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사회안전원에게 뇌물을 바쳐야 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근에는 귀국자 가족이나 중국에 친지를 둔 가정에 혼인청탁이 많다고 한다.

○연료없어 가동 못해

북한의 경제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이유중 하나는 산업시설을 가동할 연료나 기계부품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최주활씨는 『북한에도 시계공장 라면공장 요구르트공장등이 있으나 원자재와 연료가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수해 피해를 입은 농경지등을 원상 복구하려해도 트랙터등 고장난 장비를 고칠 수 있는 부품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겨울나기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에 가깝다』고 말했다. 대부분 가정은 9∼10월께 가구당 2·5톤씩 배급되는 구멍탄(연탄)으로 긴 겨울을 버티는데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질까지 떨어져 가스중독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자 이를 막기위해 가스순찰까지 도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 성행하는 밀매와 뇌물,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 국제 원조난 등 「자립형 사회주의」의 고수는 결국 북한 주민들을 끝없는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다.

◎“군간부들 불륜행각 잦다”/군차출로 부대주변 남성적고 성관념 희박/전화음담·성관계 등 발각돼도 징계 곧 풀려

북한에서는 군 간부의 여자 비서를 「깔개」로, 중사를 인근 지역의 처녀들과 자주 놀아난다고 해서 「연애중사」로 부른다. 그만큼 북한 사회에서 「부화(불륜)」는 흔한 일이 됐다는 게 귀순자들의 증언이다.

최주활씨가 전하는 부화의 몇가지 예.

▲93년 인민무력부의 한 군관은 관계를 가졌던 유부녀와의 진한 성적 농담(『오늘은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하다』등)이 전화로 도청이 돼 공개비판을 받은뒤 강등됐다 ▲같은해 평양 고사포부대 사령부의 한 간부는 부대내 인민방송원과 관계를 가져오던 중, 감찰관에게 적발 돼 다른 부대로 강제 전출됐다 ▲94년 북한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에 나왔던 인민배우 김용연은 젊은 여배우들을 남자들에게 돈을 받고 소개시켜 주다 적발돼 보일러공으로 격하됐다 ▲같은해 평양 방어부대 사령부의 한 간부의 아내는 자신의 운전사를 망을 보게 하면서 차안에서 남자들과 관계를 맺다 현장에서 발각됐다.

귀순자들에 따르면 이같은 북한의 불륜관계는 특히 군간부나 하사 이상의 사병들사이에서 빈번하게 이뤄지며 그 수도 80년대 말 이후 급증하고 있다. 한 귀순자는 『군인들과 군부대 인근 지역 여성간의 불륜이 유난히 많은 것은 대다수 젊은 남성의 군대 차출로 인해 일반 주민들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또한 80년대 말 이후 돈벌이와 출세가 중시되면서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이완됐고 이와 함께 성관념이 희박해진 것도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불륜 사례의 증가는 또한 매춘의 급격한 확산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생계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며 독신녀들이 대거 매춘 현장에 몰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대는 보통 1백∼1백50원(가죽구두 한켤레의 가격이 1백50원).

최광혁씨는 『매춘은 아직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지역적으로도 제한적이지만 보통 역 주변에는 「과부집」이라 불리는 일종의 사창가가 있다. 주로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는데 역 주변에서 물어보면 쉽게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편 군에서 불륜이 적발되면 즉시 공개비판이나 자아비판을 거친 후 강등되거나 강제 제대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계급적 문제만 제기되지 않으면 통상 6개월∼1년 후에 복귀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최주활씨는 이에 대해 『술먹은 사병들이 군용열차에서 여자승무원을 희롱해 그 주동자를 총살한 경우도 있지만, 군 간부의 은밀한 불륜은 어느정도 용인해주는 경향이 있다』면서 『강등이나 「철칙제대(강제제대)」되더라도 얼마후 복귀되는 것은 빈자리를 메워줄 다른 간부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 사회1부기자

김병찬 정치2부기자

김관명 사회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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