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모든 생물은 운명공동체/문명앞세운 파괴,자살행위일뿐/우리민족 꽃 한송이 생명도 존중/옛 도자기중 꽃병 거의 없을 정도매번 그렇지만 서울 갈 때는 나도 모르게 몹시 설렌다. 혈육과 친지, 많은 친구들이 모두 그 곳에 있고 15년을 살았어도 낯설기만 한 원주를 떠난다는 생각에서 그런걸까. 아니 그렇다기보다 35년간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묻어둔 서울, 그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돈암동 길모퉁이를 스쳐가던 바람, 정릉골짜기의 물소리, 서대문 하늘가의 그 붉은 노을이며 그리고 흑석동고갯길을 오르내릴 때 내려다 보았던 한강, 겨울철새들은 애처로운 몸짓을 하고―그런 것들이 고달팠던 삶을 그 얼마나 받쳐주고 부축해주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품이 얼마나 넓고 포근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작은 콩새 한 마리 매달리듯 차창에 몸을 붙이고 지나가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본다. 서울로 가는 길 언저리의 산천은 언제 보아도 새롭다. 내 자신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풀잎들이 나의 내부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명의 몸짓 소리들이 드높은가 하면 낮게 아주 나직이 속삭이듯, 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제각기의 분위기, 표정을 지니면서, 또 그 살아 있는 것들이 군집한 산들도 각기 독특한 제 자신의 표정을 지니면서 숨쉬고 있었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이상의 진실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까지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식물도 기쁨 느껴
음악을 들려주면 닭은 알을 많이 낳는다던가. 식물도 음악을 들려주면 성장이 빨라지고 질이 좋아진다고 했다. 농촌에서는 더러 그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하니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극진히 돌보아주는 사람이 다가오면 식물은 그 사람 쪽으로 기울며 반응을 나타낸다는 얘기도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다. 왜 그럴까. 기뻐하고 어여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기뻐하고 어여뻐하는 걸까. 생명은 모두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그것을 영성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며 그 영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하며는 그들은 슬퍼하기도 할 것이다. 기뻐할 수 있다면 슬퍼하지 않을 리가 없다.
재작년이었던가 일산 신도시에 있는 정발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정발산 기슭을 향해 개발의 굉음이 사방에서 물밀 듯 밀려오고 있을 때였다. 나는 산길을 헤치고 들어가면서 야윈 소나무들이 절망과 공포에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원주에서도 회갈색으로 변한 밭둑길, 들판을 바라본 일이 있었는데 제초제를 뿌린 죽음의 자리였다. 그때 종말같은 공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파헤치고 무너뜨린 산림, 헤일 수 없는 초목이 쓰러진 현장을 보았을 때도 참혹한 학살을 실감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하여, 당연히 대답은 그렇게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대답이 그것이며 우리의 입을 막고 어리석은 몽상가, 이상주의자로 치부하며 조용하게 있는 것도 산다는 문제의 그 정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생존을 위한 오로지 그 이유 하나뿐이라면 지구는 결코 병들지는 않을 것이다. 생물이 생존하는 것은 순리일 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로서 모든 생물,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절실하게 말한다면 지구와 모든 생명은 공동체이며 같은 운명이다. 살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죽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고 해야만 옳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죽은 별에는 공기가 없고 물이 없으며 생물도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이, 공기가, 생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억조창생 일체가 그 생존의 조건이 같으며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능도 같아서 일사불란하게 순환해 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래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해 오긴 했지만 여하튼 20세기 초반 인류는 조물주의 창조능력과 자연을 통제하는 권한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지구의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불행은 능력을 옳게 쓰지 못하고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사실 오늘날 인류는 달나라로 가는 일보다 파괴된 지구를 복구하고 뚫린 오존층을 꿰매는 일이 보다 시급하다. 있어야 할 것은 있게 하고 없어도 무방한 것, 있어서 해독이 되는 것은 없게 하라고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문화의 지류인 문명이 주류로 변할 때 생존과 무관한 잡동사니는 범람하게 마련이며 멸망은 그 시기에 다가오는 것이다. 역사에서 그렇게 멸망한 예를 우리는 적잖이 보아왔다. 다만 과거에는 어느 지역, 어느 국가, 민족에 한한 것이었기에 설사 그 문명으로 하여 황폐해졌다 하더라도 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발전이라든지 생활향상이라는 강력한 구호 아래 오늘은 지구 전반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야말로 공룡과도 같이 지축을 흔들어대는 자본주의는 기실 지구를 위시하여 모든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라는 것이냐, 더러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새로운 시간, 20세기의 잘못 진입한 궤도를 어떻게 수정하는가에 따라 지구의 명운은 결정될 것이다.
어릴 적에 일자무식인 내 어머니는 『그것도 생물인데 꽃모가지를 함부로 꺾는 것은 안 좋다』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물론 그 말은 어머니의 발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옛적부터 우리 민족 본래의 사상, 더 깊이 근원을 찾아가면 샤머니즘의 그 생명공경의 사상에서 비롯된, 잠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천년, 오백년을 살아온 거목에 대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며 거목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생명이 갖는 동질감, 그 존귀함을 믿으며 생명의 일체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영성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생명의 무한류전을 믿음으로써 죽은 자들이 있을 다른 공간과의 교신을 열망했을 것이며 그것은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물음, 생명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자대비, 큰 슬픔이 있기에 큰 자애가 필요하고 결핍이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슬픔, 결핍 없는 것은 완성이며 정지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삶이 아니며 생명으로 인식할 수도 없다. 생명은 영원한 미완이요,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며 끝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은 우리 민족의 생명에 대한 공경은 그 자체가 세계주의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살아 있는 일체에 대한 평등, 그와 같은 사상은 우리 민족문화 전반에 걸쳐 그 흔적이 뚜렷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많다. 우리 도자기의 경우 꽃병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거주공간에서는, 사랑이며 대청 안방 신방 할 것 없이 생화를 꽂은 꽃병이 연상되지 않는다. 대신 생활용품, 모든 것의 장식에는 꽃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경대보 밥상보 수저집 베갯모 화태보(벽면을 가리는 큰 보자기, 커튼같은 것) 방석 염낭 아이들 신발에서 버선 의복 처네, 생각나는대로 떠올려 보았는데 대개의 경우 현란한 꽃과 상서로운 동물이 수놓아져 있었다. 나도 젊었을 때 꽃을 수놓은 검정 누비처네를 두르고 아이를 업어 키웠다.
사찰의 불당을 장엄하게 했던 것은 종이꽃이었고 당집이나 상여를 꾸민 것도 종이꽃이었으며 와당이나 사찰의 문살에도 꽃이 새겨져 있다. 가구며 집기,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언젠가 TV에서 보고 감탄했는데 진주의 거멀장식박물관에 소장된 것만으로도 꽃과 동물 곤충을 소재로 한 장식의 다양하고 풍만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도자기에 꽃병이 별로 없다는 것은 꽃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며 생명을 존중하며 연민을 느끼는 마음 탓으로 볼 수 있다. 대개 서민들의 집에도 장독가에는 분꽃 접시꽃 봉선화등을 심었으며 그 꽃들은 우리하고 매우 친숙했다.
흐드러지게 생화를 장식하는 서양, 특히 일본 가옥에는 도코노마라는 것이 있어서 생화나, 축소하여 식물을 불구로 만든 분재같은 것을 놓아 두는 것이 생활풍습인데 그렇기 때문에 꽃꽂이라든가 분재가 일본에서는 성행했다.
그러나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꽃꽂이는 조선인에겐 생소한 문화였고 분재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심했다. 이같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뚜렷하게 문화의 성향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는 언제나 심성의 반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명은 기능에 속한다. 따라서 그것은 유물적인 것이다. 종래는 사람도 물량으로, 인력으로 간주하며 목적이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는 그와 같은 기능이 우선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그들의 번영도 기능에 편중한 결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고 창조의 원천은 없는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 생화의 화려함, 황금의 빛은 자본주의의 한 전형이다.
서울을 지났다. 일산에 도착하여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아파트 특유의 냄새가 콧가에 스쳤다. 매우 기능적이며 도식화한 공간에 피곤한 몸을 내렸다. 한두 번도 아닌데 원주서 떠날 때는 왜 그렇게 마음이 설레었는지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서울도 15년전의 그 모습은 아니다. 용무 한 두 가지를 끝내고 나면 아무 할 일이 없고 쓸모 없는 짐짝같이 벽에 기대어 연이어진 아파트의 건물, 창문을 망연히 바라본다. 처음에는 머리 속이 뒤죽박죽, 정리 안된 창고같았지만 차츰 하얗게 비어 식물인간같은 느낌이 든다. 도대체 어디다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며 친구, 그 어느 누구를 어떻게 찾아 가야 할지, 아주 멀고 먼 일처럼 느껴진다. 결국 아무도 만나보지 못한채 허둥지둥 떠나게 되는데 한강에 이르러 비로소 내가 나에게로 돌아온 것을 깨닫고 금년에는 철새가 얼마나 왔을까, 고개를 빼고 물위에 떠 있는 철새를 바라보게 된다.
○차행렬을 탈출 심리
언젠가 한 번 딸애하고 통일전망대를 갔는데 가는 도중 통일로 길섶의 풀밭에서 도시락을 펴놓고 휴일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았다. 쉴새 없이 차량이 달리는 길섶,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또 전에는 휴일이면 서울서 쏟아져 나오는 차량들을 보고 「먹고 살만하니까」라고 다분히 비판적이던 내 자신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적인 일종의 탈출심리가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탈출하자! 생명은 생명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금싸라기같은 땅, 한 자 한 치도 내놓을 수 없는, 건물이 밀집되어 숨쉴 수 없는 곳임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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