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전처의 북한탈출 소식이 가져다 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이 평양 주재 러시아 무역대표부에 침입해 망명을 요청했다는 이타르 타스통신의 보도가 날아들었다. 비록 탈출 보위부요원의 사망으로 망명시도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잇따른 북한체제 내부의 동요현상에 주변의 사람들은 북한이 금방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전망들을 하고 있다. 정말 북한의 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간 것일까?성혜림의 탈출소식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던 지난 월요일 하오 나는 뉴욕 타임스의 도쿄지국장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근래에 북한내부에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체제동요 사태와 북한의 붕괴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이었다. 내 답변은 북한이 체제와해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른 시일안에 붕괴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스에 인용보도된 「북한의 지도체제가 인민들로부터의 두려움을 계속 누르고 있으며 이는 붕괴를 앞당기게 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답변뒤에 이어졌던 전화상에서의 나의 언급은 「그러나 북한은 50년을 지탱해온 견고하고도 비타협적인 체제(Hardshell System)를 갖고 있으며, 이는 북한정권의 붕괴를 지연시켜줄 것이다」였던 것이다. 지금 북한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잇따른 망명사태와 체제동요 현상은 일면 심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는 앞으로 적어도 5년 이상은 존속할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판단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바로 북한체제가 갖는 특수성에 근거한다.
일제로부터의 해방후 우리민족은 새로운 정치체제 창출의 기회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일제 36년의 지배는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기존의 정치조직과 제도 및 질서를 송두리째 붕괴시켰고, 이는 우리 민족에 새로운 토양, 마치 백지와도 같은 상태에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갈린 채 각기 다른 체제를 수립, 발전시켜 왔다. 북한은 그 새로운 토양 위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견고하고도 굳건한 전제주의적인 독재국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독재는 수십년에 걸쳐 대를 물려가며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주민들은 극히 일부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으로 구분지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마치 대물림 종으로 태어나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하인처럼 항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난 수십년을 지내온 것이다. 이와 같은 굴종의 경험과 그에 길들여진 의식구조는 경제상태가 최악이 된 상황에서도 북의 체제를 지탱시켜주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의 의식구조와 더불어 북한체제의 존속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체제의 핵을 이루는 일정한 수의 체제유지계층과 막강한 군대의 존재이다. 북한과 같은 전제국가, 테러국가에서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계층을 의도적으로 양성한다. 현재 평양을 중심으로 모여살고 있는 주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수해와 흉년으로 인하여 북한의 식량상황이 최악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주민들에게는 일정한 정도의 배급이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특혜는 군대에도 적용되어 군부대에 대한 배급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정수준의 핵심적인 체제유지계층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력수단을 보유하고 있을 때 그 체제는 붕괴되지 않는다.
흔히 정치체제의 존속을 위해서는 총, 자금, 조직, 이념의 네 가지 정치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해지는데 북한은 이 네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의 독재와 군비제일주의가 가져온 폐해, 냉전의 붕괴로 자금과 이념이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굳건한 조직과 총이 그것을 지탱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목격하고 있는 일련의 동요현상에 현혹되어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된다. 우리국가 또한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관료의 월북을 경험한 적이 있다. 북한과 유사한 카스트로 지배하의 쿠바와 같은 곳에서도 친딸이 서방으로 망명해 자기 아버지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그 국가가 곧 망할 것이라고 단정짓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안의 요소가 있을 때 상황은 오히려 위험해진다. 지금 우리주변을 둘러볼 때 총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이요, 일련의 탈북사태에 국민의 안보의식은 어느 때 보다도 해이해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다」라는 낙관섞인 전망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결코 방심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쉽게 붕괴하지도 않을 것이며, 위기에 몰린 북한이 어떤 도박을 감행할 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북한과 휴전상태에 있으며, 안보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에 하나 이땅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가 피땀흘려 이룩한 것들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대응이 필요하다. 국민 각자의 안보의식을 점검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이들은 장기적 전망에서의 총체적인 전략수립에 더욱 힘써야 한다. 북한은 결코 쉽사리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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