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20∼30장 미만 명료한 주제 압축된 문장 특징/독서성향 생활패턴 변화 등 부합 소설 새 돌파구 기대장편이 선도하는 소설시장에 단편보다 짧은 글로 새로운 판도를 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미권과 일본등지에서 대가들의 짧은 소설이 널리 읽히는 추세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 소설계에서 소외됐던 장편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곧 나올 계간 「작가세계」 봄호에는 「초단편소설」이라는 제목아래 최성각씨의 「토신의 갈등」 「사자의 벽보」, 하창수씨의 「원전마을에 뜨는 무지개」 「햇볕」 「GODOT의 긴 의자」등 5편이 실린다.
원고지 20, 30장을 넘지 않는 이 소설들은 뚜렷한 메시지와 간결하고 압축된 문장이 특징이다. 최성각씨는 그동안 써온 짧은 이야기 40여편을 모아 「택시 드라이버」라는 작품집도 곧 낼 예정이다.
최씨는 『콩트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쉽게 쓰이며 급격한 반전을 특징으로 가지는데 비해, 「짧은 이야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소설은 완결성이나 문장의 묘미를 위주로 문학성을 살리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길이로 작품성을 재단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문학평론가 김경수씨는 「작가세계」에 실린 작품해설에서 영미권의 「Short Story」 「Sudden Fiction」, 일본의 「초단편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형식을 「엽편소설」이라 이름붙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콩트가 소설이 되지 못한 이야기, 소설로 구성하기에는 조금 모자라거나 완결성을 지니지 못한 파편적 이야기라면 엽편소설은 세계관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 콩트와 다르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다소간 자유로운 짧은 글로 주제를 명료히 드러내며 밀도있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전혀 소설의 본질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황순원의 초기소설 「저녁놀」, 허윤석의 「조사와 기러기」, 조세희작품집 「난장이마을의 유리병정」등을 예로 들어 주제가 얼른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디테일 묘사보다 전체 이미지로 서술하는 특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김씨는 『소설위기론을 불식하기 위해 이야기성과 문학성을 지닌 이야기문학을 축조하는 일이 긴요하다』며 『독서성향·생활패턴 변화에 부합하는 이런 작품은 우리 소설의 한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내다봤다.<김범수기자>김범수기자>
◎엽편소설의 작품 예/토신의 갈등/최성각 작
도둑들의 세상과 맞닥뜨리자, 여말의 문장가 이제현을 나는 가끔 떠올리곤 한다. 친원파들이 원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의 한 행정구역으로 나라를 편입시켜 달라고 애원할 때, 분연히 붓을 들어 그 부당함을 원제에게 납득시킴으로 고려의 사직을 지킨 이로 이제현은 기록되어 있다. 나라를 접수해 달라던 친원파들의 간청을 역사는 행성책동이라 불렀다. 가까운 일제때에도 황국신민됨이 행복해 어쩔 줄 모르던 친일파들이 있었다. 해방후에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는 게 상책이라는 망상을 펼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한 세상 살아내기 고달픈 서민무지렁이들이 아니라 나라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내로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현이 쓴 「역옹패설」에서 나는 우물쭈물하는 귀신들을 만난 적이 있다.
추밀 한광연이 집을 수리할 적에 음양에 구애받지 않고 제 편리한대로 하자 그 이웃사람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십여 명이 좋지 않은 낯색으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우리 집 주인양반이 집수리를 하도 오래 끄는 바람에 우리들이 편히 살 수가 없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말했다.
『화를 주면 되지 않겠는가』
검은 옷을 입은 다른 사람이 의견을 냈다.
『자네 알다시피 내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해서가 아닐세』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그렇담 뭘 망설이는가?』
화를 주라는 의견을 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가 청렴한 것을 내 중히 여기기 때문일세』
꿈을 꾸고 있는 이웃사람이 용기를 내 그 집 종자에게 저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종자는 그들이 한공댁 토신들이라고 답했다.
옛날에, 귀신은 청렴한 이를 아주 골치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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