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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잘산다” 소문 지배층도 동요(육성증언/북한은 지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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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잘산다” 소문 지배층도 동요(육성증언/북한은 지금:2)

입력
1996.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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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사회주의 몰락 중국개방 영향으로 남한소식 점차 확산 탈출목적지로 인식”/한번 죄지으면 출소후 갈곳 없어 끝장/“감시의 눈” 갑작스런 강등·처벌 공포감『못 먹고 못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억울함을 풀어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지난해 12월 귀순한 이순옥(49)·최동철씨(29) 모자가 함북 온성군 고향을 떠난 사연은 생활고라기보다는 누명으로 인한 이씨의 수감생활, 석방후에도 「원상복귀」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이들 모자의 절망감 때문이었다. 지난해 9월, 10월에 각각 귀순한 최주활(46), 안영길씨(39)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조선 인민군의 군관으로 일반인들에 비해 안정된 생활을 누렸으나 주변을 압박하는 정보기관의 감시와 노력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체제를 견디지 못해 끝내 삶의 터전을 이탈해야만 했다.

오랫동안 독재정권이 유지돼온 북한에서 유독 최근 들어 사회통제가 강화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른바 성분이 괜찮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탈북사태가 이어지는 것은 역시 동구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중국의 개방으로 남한 등 북한 외부의 소식이 어느정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한이라는 「탈출구」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확산돼 가고 있다.

귀순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화려할 줄은 몰랐지만 남한이 자유롭고 잘 산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갈수록 남한이 북한주민에게 현실탈출의 목적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사회의 지배층인 군관 출신 최주활씨와 안영길씨는 자율적 성취동기를 가로막는 경직된 사회체제와 불평등한 성분제도, 정보기관의 감시망을 우려하며 『이대로 가면 북한사회가 위험하다』는데 견해를 같이한다.

인민무력부 직속 후방총국 양식국 참모(대위)였던 안씨는 귀순동기를 성취욕구가 막혀버린데 대한 「직무불평」이라고 솔직히 털어놓고 있다. 공병분야 전문가였던 그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진급이 안돼 나이 어린 상급자들로부터 수모를 받아야 했다. 군사대학을 비롯한 대학 진학도 허용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몇 차례에 걸친 제대의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대에서는 저녁식사후까지 남아 일하며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했지만 밖에서는 남들 보기가 부끄러워 늘 사복차림으로 다녔다』고 말했다.

○6촌까지 성분조사

북한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소속 부대나 직장에서 순조롭게 진급하려면 이른바 6촌 친척까지는 성분이 깨끗해야 한다.그러나 안씨의 경우 5촌친척 중에 치안대(6·25 당시 북한에 진주했던 국군에 협조한 사람들) 가입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88년부터 귀순하던 지난해까지 7년간 양식국 96공병대 등 두 부대에서 대위로만 일했다. 이는 「같은 계급으로 부대를 옮기지 않는다」는 북한의 군인사원칙에 어긋나는 불이익이다. 각종 훈장만 13개를 탄 안씨는 성실성과 업무처리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북한사회는 그의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는 체제였다. 안씨는 그같은 「직무불평」은 북한 사회에서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최주활씨는 성분간의 불평등대우나 성취동기를 가로막는 경직된 사회체제 외에 정보기관의 감시횡포도 북한체제 발전의 장애요소라고 지적한다.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소속 부부장 출신인 최씨는 평양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북한의 대외사업과 관련해 해외여행 경험이 많은 군고급간부였다. 그는 지난해 초부터 중국에서 합영사업 업무를 맡다가 남한측 인사들과 연계되는 바람에 그대로 중국에 머물렀다가 귀순했다. 『남한 정부가 의도적으로 나를 남한인사들과 접촉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렇게 되면 북으로 돌아가서 무조건 처벌받는다. 감시받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에 따르면 특히 외국 유학이나 주재근무, 또는 출장 경험이 있는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국가보위부 등 정보기관의 감시대상이다.

최주활씨의 증언.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소속 간부의 10%가 헝가리 폴란드 등 외국 유학생이며 이들은 대부분 감시대상으로 최근 외국 출장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다. 이들이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서구사상을 유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이같은 감시와 보고로 인해 일선기관 간부의 갑작스런 강등과 처벌이 잦아 업무수행에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 러시아 주재 대사관 무관 N대좌의 경우 각종 연회 등 모든 외부인사와의 면담상황이 종합보고되고 있고 전러시아주재 대사관 부무관 출신의 Y상좌는 국내에서 불안에 떨며 생활하고 있다. 대외사업국의 한 간부는 처남이 독일유학시 술자리에서 북한을 비판하고 서방국가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군에서 쫓겨났다』

최씨의 계속되는 증언.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같은 정보기관의 감시보고 내용이 실적 위주로 치닫는 경향이 심해 국가보위국이 오히려 국가안전의 저해요소가 된다는 불만도 군 등 주요기관에 팽배하다.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의 한 불가리아 전문 지도원의 경우 국가 보위국 조사 문건과 간부국 조사 문건의 내용이 판이했다. 이렇게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씨는 이처럼 인력관리에 허점이 노출돼 일선기관의 효율적인 업무수행에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순옥·최동철씨 모자는 이씨의 수감으로 일순간에 신분이 바뀌어버려 재기가 불가능해진 경우다. 함북 온성군 상업관리소 간부물자공급소 책임자였던 어머니 이씨는 누명으로 6년2개월동안 함북 구류장과 평남 개천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아들 최씨는 그 때문에 북한 핵심권력기구의 하나인 국가보위부(지금의 국가안전보위부)부원에서 평범한 농장일꾼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이씨가 출소한 뒤 북한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모진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고문 시달려

이씨의 증언.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그 대가는 너무 비참했다. 북한에서는 이 원한을 풀 수도 밝힐 수도 없다. 상대방 가족 가운데 반당분자가 있을 경우 남편이든 부인이든 이혼을 요구당한다. 시집이나 처가 식구 때문에 함께 신세를 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죄를 짓고 교화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출소해도 갈 곳이 없다. 사회안전부에서 지정한 협동농장에 가더라도 냉대받고 가족들도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픔과 외로움에 다시 죄를 저지르고 재수감되기 일쑤다. 한번 죄를 지었다하면 그걸로 끝장이다』

이씨는 함북에서 상업분야의 일꾼으로 인정받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당원이 됐다. 식량 배급사정이 안좋을 때 꿀벌을 쳐서 탁아소 어린이들에게 배급하는 등 김정일로부터 공로를 평가받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상업일꾼열성자회의에 특별히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당간부의 아들결혼식용 양복지를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바람에 미움을 사서 「국가재산탐오죄」라는 누명을 쓰고 86년 10월 교화소에 갔다. 그는 공개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아직 50세가 안된 그는 원래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나이가 환갑을 넘어보인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의 어린이 놀이기구를 탈때 할머니여서 안된다고 제지를 받을 정도가 됐다.

『92년 석방된 후 당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재수감하겠다는 경고를 받아 배신감을 떨치지 못했다』는 이씨는 94년2월 조선족 친척이 사는 중국으로 탈북, 그곳에서 김일성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만수무강한다고 해놓고 그러지도 못하면서…, 이제야 원한이 풀린 것 같아 마음껏 울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 최씨는 함북 온성군 온성남자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국가안전보위부원으로 선발돼 군에서 3년을 근무한 뒤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학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 그런대로 잘 나가던 그는 3학년 때 어머니가 수감되자 강제퇴학 당해 함북 온성군 4·25 담배농장원으로 일하게 됐다. 최씨는 이때 처음으로 심각하게 자신의 능력 및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처지가 결정되는 사회체제에 의문을 품게 됐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노력하면 다시 입장이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최씨는 92년 12월 어머니의 석방을 계기로 대학재진학을 시도했으나 응시자격부터 주어지지 않아 신분복귀의 길이 원천봉쇄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씨는 『어떤 경쟁에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면서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뭔가라는 것을 절감했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이상 이곳에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김정일을 비롯한 최고위층 인사들과 그 측근들의 어지간한 「과오」는 눈감아지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안영길씨는 『고위급 인사들의 가족이 잘못을 저지르면 호적에서 당사자의 이름을 빼고 가벼운 처벌만 받는다』면서 『귀순한 외교관 현성일의 아버지 현철규와 삼촌 현철해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주활씨는 『갈수록 김정일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 군과 당의 각 간부들이 책임부담 때문에 사소한 문제까지 김정일에 보고, 지시를 받고 있다』며 『행정체계와 사회체제가 똑같이 경직돼 북한사회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범죄·암시장 등 북사회도 “골머리”/일부항구선 외국인상대 매춘외화벌이/밀매도 성행 뇌물액 노동자월급 250배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도 성범죄 및 아편재배와 생필품 암거래, 권력기관의 고문과 특권향유, 조직폭력배 활동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어긋나는 각종 불법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며 우리가 생각하는 여가생활은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

평남 개천교화소에서 수감생활하며 경리업무를 맡았던 이순옥씨에 따르면 교화소에서도 물건빼내기가 유행하고 있다. 개천교화소의 경우 외국산 옷감이나 가죽이 들어오면 바지와 주머니를 빽빽이 재단하고 남은 부분은 안전원 등 교화소 간부들이 암시장에 내다팔거나 착복한다. 귀순자들은 물건이나 식량 빼돌리기와 관련해서 당간부는 당당하게, 안전원은 안전하게, 군은 사단에서는 사정없이, 연대에서는 연대해서 빼돌린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밀매가 차츰 규모가 커지고 있고 당이나 군간부와 결탁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순옥씨는 『밀매를 위해 당·군의 고위간부들에게 가는 뇌물이 최고 1만원까지 올라갔다. 일반 노동자 월급이 40∼50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지만 그만큼 밀매규모가 커졌다고 봐야 한다. 암시장에서 4인 가족의 한달치 채소를 사려면 300원 가량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재일교포들이 북송 교포들에게 보내는 물건들이 암시장에서 인기가 좋아 일본제 양복 한벌은 2,000∼3,000원(입쌀 60㎏값)에 거래된다는 것이다.

매춘과 혼외정사, 성범죄도 성행하고 있다. 최주활씨는 당고위간부들의 「바람」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만큼 많이 알려졌고 일부 항구에서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이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최씨는 또 한 고위급인사의 승용차운전수가 김일성동상에 헌화하러 가는 여대생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 정치사건화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군을 비롯한 주요기관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보기관의 사찰활동도 북한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요소다. 안영길씨는 『부대내의 톱밥 이동문제까지 국가보위부에서 간섭을 해 그런 것은 부대장이 알아서 처리하면 될 사안이라고 큰 소리를 낸 적이 있다』며 정보·사찰 활동이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막는다고 지적했다. 안씨와 최주활씨도 국가보위부의 요청에 따라 「정보원」역할을 맡아 주변 인물들의 동향을 보고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신의주 등 도시에서는 성분이 좋고 권력의 보호를 받는 조직폭력배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귀순자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한 최동철씨는 『성분만 좋아 입학할 수 있었던 당이나 군 고위 간부의 자제들은 대부분 수업시간에도 자주 졸고 거의 공부를 하지 않는다』며 『이들 때문에 면학 분위기가 흐려진다』고 말했다. 최씨는 학생이나 일반 시민들은 공부와 노동, 업무외에 저녁때는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여가개념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사회1부)

김병찬(정치2부)

김관명(사회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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