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 북아일랜드 평화 다시 침몰할 위기/성의없는 영협상태도 반발/휴전파기 1시간만에 감행살얼음판을 걸어오던 북아일랜드의 평화가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테러로 다시 산산조각날 위험에 처하게 됐다. IRA는 9일 북아일랜드 휴전 파기를 선언한데 이어 1시간만에 런던 동부 금융가의 호텔건물에서 강력한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이번 테러사건은 평화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영국에 불만을 품은 IRA의 소행으로 보인다. IRA는 성명에서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실패의 책임은 존 메이저 영국총리와 영국 정부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IRA는 영국에 북아일랜드의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회담을 벌일 것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으나 영국은 IRA의 무장해제를 선제조건으로 내세워 계속 회담을 지연시켜왔다.
특히 지난 1월 북아일랜드 문제에 관한미국 주도의 국제위원회가 평화협상에 앞서 가톨릭계 IRA가 먼저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영국의 입장과는 달리 IRA와 친영 신교계 무장세력이 협상기간에 함께 무장 해제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때 메이저총리는 평화협상을 도울 수 있는 북아일랜드 의회구성을 위한 특별선거를 실시하자는 신교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바로 이 대목이 휴전파기와 테러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IRA의 입장에서는 메이저총리의 이같은 발언은 평화협정의 조기타결 가능성이 사실상 「물건너 간」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내부에서는 비폭력적인 수단이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결코 종식시킬 수 없다는 의식이 다시 싹텄고 이번 테러는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
하지만 이번 테러를 단순히 영국에 대한 평화협정의 조속한 추진촉구라는 의미로 축소 해석한다면 평화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은 아직 남아있다.
IRA강경파들이 신교도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위해 영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사건은 신교도내 휴전반대세력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신교도측 무장세력과 IRA로 대표되는 가톨릭교도간 보복테러의 악순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있다.
그럼에도 불구, 94년 9월이후 17개월동안 북아일랜드에 찾아든 평화분위기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조재우기자>조재우기자>
◎IRA는 어떤 조직/아일랜드 통합추진 반영국 게릴라단체/정치조직으로 신페인당 전면에 내세워
이번 폭탄테러를 자행한 아일랜드공화군(IRA)은 69년부터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통합을 추진하며 반영 테러활동을 전개해온 가톨릭계 게릴라 조직이다.
1913년 조직된 아일랜드 독립투쟁단체인 아일랜드민병대의 후신으로 현재 1만8,000명의 조직원이 있지만 이중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300명에 불과하다. 정치조직으로 신페인당을 전면에 내세운 IRA는 그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뿐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테러를 감행, 3,100명이상의 사망자와 3만6,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재정지원은 대부분 미국내 아일랜드계 재력가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난 70년대에는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국가원수로부터 100∼300톤가량의 무기를 지원받기도 했다.
IRA의 투쟁사는 16세기 영헨리 8세의 아일랜드 정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교중심의 영국이 주민 대부분이 구교를 신봉하던 아일랜드 섬을 점령, 영국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킨게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1921년 아일랜드는 독립했지만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가 절대 다수였던 북부지역은 신교도들의 극렬한 반대로 아일랜드에 귀속되지 못한채 영국영토로 남게됐다. 때문에 아일랜드와 함께 합쳐 독립하기 원했던 북부 원주민인 구교인들이 무장항쟁을 벌이게 됐다.
잔인한 테러단체와 독립투쟁 영웅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아온 IRA의 저항은 81년 보비 샌즈등 10명이 감옥에서 단식중 사망함으로써 세계의 동정을 사기도 했다.<이상원기자>이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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