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만 박수를 치고 찬사를 보내는 이가 많지 않다.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생겨날 시점일 터인데 정녕 국민의 가슴 속에 자라나는 것은 「냉소」와 「무력감」이다.진실을 말하기에 어딘지 어색한 검찰의 과거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루머가 진실이던 사회에서 살아온 국민의 상처받은 마음에 있다.
국민은 검찰이 역사의 진실을 말하기 전에 이미 그 진상을 알고 있었다. 경복궁 모의와 광주학살은 거대한 정보기구를 장악한 신군부에게나 비밀이었다. 국민은 언론을 통해 「사령관」과 처음 대면할 때부터 그 인상에서 호전성과 무모함을 느꼈고 역사적 사건의 전후과정에서 이미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각자가 이 소문 저 소문을 연결하여 짜맞춘 시나리오는 신군부의 그 어떠한 공식적 해명보다 설득력이 컸다.
비자금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총선에서 어느 재벌총수가 몇백억원의 정치자금을 청와대에 갖다 바친 사실을 폭로하기 전에 벌써 국민은 정경유착의 구조를 실생활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이 수많은 측근과 함께 화려한 휴가에 나설 때 통치를 위한 비자금이 권력자 개인의 부정한 재산으로 변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석」에서 한탄하고 비판하는 것 이상의 저항을 보인 시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가 총선에서 민정당을 지지하였고 대선에서 노태우후보를 지원하였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가릴 능력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부는 신군부가 나누어주는 부와 권력에 더 구미가 돌았고 일부는 정의보다 지역성에서 「구원」을 찾았다.
그러나 대다수를 거짓의 방관자나 동조자로 추락시켜 놓은 것은 역시 안정의 논리였다. 모두가 아는 진실을 대책없이 기사로 작성하고 여론의 심판에 부칠때 불어 닥칠 혼란이 두려웠다. 수출없이는 살 수 없는 경제가 걱정이었고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상황이 문제였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아는 진실을 말할 때 벌어질 상황이 무서워 「침묵의 단지」 안에 진실을 가두어 놓은 것이었다. 이어 「때가 되면 단지의 마개를 따 진실을 말하고 순수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시작한 과거청산의 정국은 우리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다. 신군부 출신의 구속은 우리가 여태까지 걸어온 냉소와 무력함의 삶을 고백하는 고통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이라는 우리야말로 기회주의적인 「팽」정치의 주범이라는 자괴감에 고통의 순간은 새로운 냉소를 낳는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가 「이제야」가 되어 진실을 말하고 과거를 심판하면 냉소와 무력감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는 권력을 상실한 힘없는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치소로 보내는 것』이라는 독백에서 자부심을 키울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신군부는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거창한 순간에서조차 냉소와 위선과 무력감을 털어버릴 수 없게 역사를 구부려 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잠시 여당의 대선자금이 공론의 장에 등장하고 야당의 정치자금수수가 여론의 심판대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 두달이 지난 이제는 대다수가 여야 수뇌부의 정치자금문제를 「지나간 이슈」로 치부한다. 누가 공천을 받고 누가 대권주자인가가 국민의 최대관심사이기 때문은 아니다. 하물며 한국인이 한두달 전의 일까지 잊어버릴 만큼 망각의 병이 심각하기 때문은 더 더욱 아니다.
오히려 국민은 이전의 냉소적인 「게임」을 반복하고 있다.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사석에서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무책이 상책」이고 「세월이 약」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국민은 여야 수뇌부의 정치자금문제에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갖가지 「설」을 스스로 침묵의 단지 안에 가두어 놓고 정국불안에 대한 걱정없이 편안하게 말할 「이후」를 기다린다. 누구 하나 공론의 장에서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모두의 머리 속에서는 루머가 진실이 되어 「말 따로 생각 따로」의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이다. 냉소와 위선과 무력감을 떨쳐버려야 할 시점에 우리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실정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침묵은 망각이 아니고 자제는 동의가 아니다. 과거의 민주화세력이 신군부 출신과는 달리 냉소와 위선과 무력감에서 국민을 해방시켜주는 진정한 민주화세력이라면 이 사실을 직시하고 진실을 털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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