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예술은 어렵다. 어렵다는 의미 속에는 이해할 수 없고 느낌을 공유할 수 없다는 부정적 측면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발견한 이후의 경이로움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포함된다.현대무용으로 지칭되는 춤을 보면서, 또 몇몇 홍신자의 공연까지 포함해서 「네 개의 벽」처럼 현대라는 수식어가 적절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홍신자는 무대를 횡단하며 같은 동작을 서너번씩 반복한다. 단순한 걸음걸이에 팔을 놀리는가 하면 넘어질 듯 다시 서고 엎드려 허리를 넘겨보기도 하고 호롱불을 들고 무대를 왕복하기도 한다. 때로는 암흑에서 때로는 특별한 조명의 도움을 받으면서 피아니스트의 조용한 연주를 음미한다. 앉아서 고개를 돌리는 동작의 반복처럼 단조롭기 그지없는 움직임 속에서 그렇다고 뭔가를 표현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같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어떤 지속적인 감정을 다지면서 춤을 계속한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힘겹게 삶을 헤쳐가는 강인하며 순박하고 겸손하면서도 예리한 존재로 보였다.
일반적인 춤무대의 관심사로 꼽게 되는 예쁘게 보이기, 기교 자랑하기, 뭔가를 잘 연기하기와는 무관한 태도였던 이 극히 단순한 움직임은 존 케이지의 「네 개의 벽」을 연주하던 유지 다카하시의 구음이 끝나면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동작들로 변했다. 예배의식에서처럼 어떤 신성한 대상을 향한 경배의 몸짓, 이별을 생각하는 듯한 팔흔들기, 십자모양이 드러나는 붉은 조명 앞에서 뒹굴기, 잦은 발동작으로 미끄러지듯 걷기, 떨고 있던 몸을 힘겹게 끌어올리기의 각 동작이 몇 장의 슬라이드처럼 짧게 보이고는 암흑으로 단절된다.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고안된 듯한 일련의 동작들은 꾸밈이 없으면서도 참으로 표현적이다. 전통적인 한국여인의 마음 속을 홍신자가 대신 풀어내는 것 같았는데 입 눈 귀를 차례로 만지는 마지막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다.
「네 개의 벽」은 현대나 전위로 지칭되는 예술행위가 각광받기 위한 요소, 즉 시선을 묶어두는 힘을 지녔다. 행위자의 의지가 뚜렷하지 않은 춤이 인위적이고 역겨운 분위기로 단절된다면 진정한 아방가르드에는 관객을 멍한 상태로 빨아들이는 일관된 힘이 있다. 홍신자의 꾸밈없는 단조로움이 보다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형화한 춤꾼의 이미지를 이 일관된 힘으로 깨뜨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무용가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문애령무용평론가>문애령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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