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천락” 가곡 전승 “가물가물”/가사 하규일·임기준이 이왕직아악부 등서 전수/최상욱·장계춘 맥이은 최경식은 경기창의 대부목소리를 악기로 삼는 성악곡은 전통이 길다. 인간의 일상적 정서와 매우 밀접한 「노래」에는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담겨 있다. 과거 중인이상의 계층이 가곡과 같은 정교한 음악형식을 발전시켜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면 속악으로 분류되는 민요 잡가(좌창) 선소리산타령(입창)등은 각 지방의 특색을 담으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정가에는 가곡 가사 시조가 있다. 이 중 가곡은 판소리 범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성악곡으로 꼽힌다. 외국의 한 음악가는 가곡을 「숭고한 천락」이라고 말했다. 그 매력은 세련된 형식미에 있다. 시조시를 얹어 부르는 가곡의 종류는 일정하다. 초수대엽 이수대엽 농 중거 평거 두거등 남창 24곡, 여창 15곡으로 선율의 흐름에 따라 연이어 불리며 전주와 간주가 들어가는등 형식적인 재미를 자랑한다. 또 어느 음역에서나 고른 음색을 내야 하고 남창은 가성을 쓰지 않으며 모음을 풀어서 발음(예를 들면 「아」는 「아으」로)함으로써 「하늘의 소리」를 넘본다.
우리에게 이름이 익은 가객들은 김천택 김수장 이세춘등. 근대의 맥은 박효관 안민영으로부터 하중곤 최수보 하규일로 이어진다. 하규일은 20세기 초 조선정악전습소와 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과 가사를 가르쳤다.
가사는 하규일이 12가사중 4곡은 격이 낮다고 하여 가르치지 않아 나머지를 임기준으로부터 전수받았다. 12가사(백구사 황계사 죽지사 춘면곡 어부사 길군악 상사별곡 권주가 수양산가 양양가 처사가 매화타령)는 1900년 전후에 확립되었다. 선비들이 주로 부르던 가사는 가곡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부르는 이가 얼마 안 된다. 이밖에 시조창은 즉흥적으로 시조를 지어 돌려 부르는등 무릎장단으로도 연주가 되는 대중적 음악이다.
잡가 선소리산타령 민요의 구분은 서울식이다. 서울의 12잡가는 가사와 비슷하고 선소리산타령은 사당패의 노래와 연관성을 가진다고 한다.
민요에는 각 도의 기질이 잘 드러난다. 노동요등 토속민요에서 비롯됐으나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소리꾼들이 많이 지어 불러 통속민요라고도 한다. 통상 경기 서도(황해도 평안도) 남도(전라도 경상도)로 구분한다.
서울에서 잡가를 만들어 부른 사계축―서울역∼만리동 고개∼청파동일대―의 소리꾼으로는 19세기 중후반의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이 꼽힌다. 조기준의 문하에서 최상욱과 장계춘 박춘경에게 두루 배운 최경식은 많은 제자들을 키워 오늘날까지 경기창의 맥을 잇게 했다. 선소리 소리꾼으로는 약 200년 전부터 의택이 종대 신낙택 이태문의 이름이 전한다. 한말에는 여러 선소리패가 생겼는데 뚝섬패가 으뜸이고 과천패가 두번째였다. 이 중 최정식 이명길 엄태영 김태운등은 최경식·박춘재문하에서 경기잡가를 배운 이들이라 이때부터 잡가와 선소리산타령이 함께 전수되었다.
서도소리는 허덕선 김관준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잡가명창인 김관준은 서울 선소리명창 의택이와 종대의 선소리를 보고 서도 선소리를 개발, 서울에 역수출하여 인기를 모았다. 한편 문영수 이정화가 서울에 서도소리를 퍼뜨려 경기소리 명창들인 박춘재 유개동 최정식 이명길 김태운 원경태등이 서도소리에 모두 능했다. 두 소리를 묶어 경·서도창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남도에서는 판소리를 제외한 속악을 모두 잡가라고 일컫는데 판소리명창들이 함께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1920∼30년대는 잡가 선소리 민요가 음반으로 취입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권번을 통해 여성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40∼50년대는 민요계도 위축되었다. 57년 청구고전성악학원 발족, 60년대 민요발표회등을 통해 겨우 경·서도창의 맥이 이어졌다. 이어 선소리산타령이 68년에, 서도소리가 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정식 이창배 원경태의 제자들중 묵계월 안비취 이은주등 여명창들이 잡가와 경기민요쪽으로, 황용주 최창남등 남자명창들이 선소리산타령에서 소리를 이어 후학양성에 열심이다. 서도소리로는 오복녀 이은관등이 원로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요창작은 지금도 계속되지만 인기를 끌지는 못하고 있다. 토속민요도 공동체의 변화로 제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성악이라면 오페라, 가곡이라면 슈베르트를 연상하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나마 민요 잡가등은 보유자와 보존회등에 의해 맥이 이어지지만 정가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기 어렵고 현대의 생활템포와 거리가 있는 탓이다. 바쁘고 급한 솔과 레게, 랩의 세상에서 한유한 「노래」는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
◎예인들의 세계/정형화한 가곡 중인계층에 의해 발전/잡가 소리꾼들은 주로 수공업 등 종사/선소리 산타령 직업적 소리패가 주도
정가든 속가든 일정한 음악형식은 전문적 예인집단에 의해 발전한다.
정가 중 가장 정형화한 형식인 가곡은 전문가객들에 의해 불렸다. 「해동가요」의 고금창가제씨에는 허정 장현 탁주한 박상건 김천택 김수장등 숙종∼영조때의 가객 56명의 이름이 수록돼 있다.
주로 하위관리직에 있었던 중인계층이었지만 양반들과 교류할 수 있는, 대접받는 예술인들이었다. 가객들은 노래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시조 한 수쯤 읊을 수 있었고 곡에 잘 맞는 시조를 개발해냈다. 그들은 돈 받고 노래하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그들은 신분사회의 벽을 넘나드는 낭만주의자들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위는 다소 낮았지만 잡가를 만들어낸 소리꾼들도 비슷하다. 사계축 소리꾼들은 시조와 가사도 잘 불렀다.
수공업등에 종사하는 전문적 소리꾼인 그들은 가사 판소리등을 소재로 긴 잡가를 만들어 불렀다. 유개동 최정식같은 이들은 권번의 선생으로 있으면서 많은 여 명창들을 키워냈다.
보다 대중적인 선소리산타령은 서울의 또 다른 소리꾼들에 의해 발전했다. 이들은 직업적인 소리패를 이루었고 한말에는 뚝섬패 한강패 쇠봉구패 용산삼개패 과천방아다리패등 숱한 소리패들이 생겨났다. 평양에서는 날탕패 선소리꾼이 유명했다. 선소리산타령과 연관있다고 전해지는 사당패는 소리광대 뿐 아니라 다른 광대들과 함께 떠돌아 다니며 각종 연희를 선보였다.<김희원기자>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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