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옛 친구한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함께 다녔던 학교를 들추어내고 그 때 잘 어울렸던 친구들의 이름을 들먹인 끝에 서로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애들이 몇이고 어디 사느냐고 이것저것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난 다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장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만 반가웠던 나머지 얼떨결에 어정쩡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수원역에서 저녁 대여섯 시에 만나자고 대충 말해버린 것이다. 다섯 시에 만나야 할 지 아니면 여섯 시에 만나야 할 지 시간도 모호하고 또 장소도 역 앞 광장인지 대합실인지 아니면 전철역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게 말해버린 것이다. 당장 만난다는 기쁨에 전화번호 묻는 것도 잊어버려서 할 수 없이 미리 나가 기다릴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역 앞 광장과 대합실, 그리고 전철역을 수없이 들락거리는 고역을 그날 비싸게 치러야만 했었다.
이렇듯 우리의 약속에는 정확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흔하다. 매사를 대충대충 처리해 온 오래된 관습 때문이다. 크고 작은 사건 이면에 수없이 많은 「대충대충」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그리고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가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적당히 넘어간 이 「대충대충」의 씨앗이 앗아낸 필연의 결과인 셈이다. 정확하고 치밀한 사전계획, 원칙에 충실한 실행과 철저한 사후관리가 뒤따랐다면 분명 사고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는 4월엔 15대 총선이 있다. 지금 공천을 받기 위해서 후보자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만에 하나 여기에도 「대충대충」이 통한다고 하면 그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꼴이 된다. 바르고 엄정한 기준을 정하고 그에 합당한 후보자를 각 당은 필히 추천해야 할 것이다. 지연과 학연을 앞세우고 돈을 앞세우는 함량미달의 후보자는 무조건 뽑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 각 후보의 공약이 당선 후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지키지 못할 공약이라면 애당초 내놓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 공약들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을 그냥 좌시할 수만은 없다. 제발 「대충대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임동윤시인>임동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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