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막노동판서 일군 영광/서울대 인문계수석 장승수씨 합격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막노동판서 일군 영광/서울대 인문계수석 장승수씨 합격기

입력
1996.02.03 00:00
0 0

◎“가난의 열등감이 삶의 원동력”/어릴적 아버지 여의고 「진짜가난」 체험/막일로 목돈마련→공부→다시 일 반복/참고서 살돈없어 교과서만 수십번 봐/지난5년 잠재력 찾았던 시간… 어려운이에 용기줘 보람올해 대학입시에서 서울대 인문계열에 수석합격한 장승수씨(25·대구경신고 90년졸)가 2일 한국일보사에 고난과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자필로 진솔하게 기록한 합격기를 보내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장씨는 가난으로 고교 졸업 후 아파트 공사장등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 4번 실패 끝에 영예를 안은 4전5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지난 생은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로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다. 장씨의 수기를 독점 게재한다.<편집자주>

우리는 다 그만 그만한 열등감을 안고 살아간다.

열등감은 때로 우리의 가슴에 굴곡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생을 이끄는 막대한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열등감은 삶의 물꼬를 트고, 나를 어느 한 길로 이끄는 에너지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태수」는 남자라면, 특히 청소년기의 남학생이라면 한번쯤 선망해 보는 멋있는 인물이다. 비록 우리가 「태수」의 삶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고교 때의 나 또한 그랬다.

우리집은 아버지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돌아가신 후 진짜 가난했다.그러나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욕망에 되비쳐진 내 모습에는 심한 열등감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교 시절은 이같은 열등감과 싸우는데 바쳐졌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고, 대학 진학도 가난한 형편으로 생각조차 해 볼 수가 없었다.

90년 대구 경신고를 졸업한 후 나는 오토바이가 타고 싶어 오토바이를 타고 하는 일을 골라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식당 물수건을 날랐고 가스통을 배달했다. 그 한 해 나의 열등감은 어느 정도 치유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특히 좋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는 내가 모르는 어떤 정신적 세계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나의 열등감은 1백80도 방향을 바꿨다.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 것이다.

졸업 다음해의 입시 첫 도전 때 나는 고교 내신(5등급)에 아랑곳 않고 고려대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후 세차례나 계속 쓴맛을 보아야 했다.

무리였던 것이다. 공부가 체계적이지도 못했고 공부 외에 생활비와 동생 학비도 염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는 계속 기울었다. 어머니 혼자서 어린 두아들과 집안살림을 감당하기는 벅찬 일이었다. 어머니는 온갖 궂은 일을 다하며 애썼지만 집안은 계속 기울어 고교시절엔 납입금 조차 제때에 내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생은 92년에 고려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도 필요했다. 한해의 앞 부분은 막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나머지는 입시 준비에 매달리는 생활을 2년동안 계속했다.

그동안 실력은 조금씩 나아졌고 공부하는 일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져 갔다. 그렇지만 대학 입학은 어려워져만 갔다. 대입제도가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과 본고사 체제로 바뀌어 수험기간이 짧은 나를 옥죄어 왔고, 내신 성적의 반영 비율도 커졌다. 이러한 가운데 93학년도에 서울대 정치학과와 94학년도에 서울대법대에 지원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실패의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어느덧 24세가 되면서 이제는 집안살림을 본격적으로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없이 막일을 시작했다. 인문계 고교를 졸업해 특별한 기술이 없는 나로서는 짧은 시간에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내게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고교 졸업후 5년 경과자는 수능성적으로 내신성적을 산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새로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리고 96학년도는 내가 이 규정에 해당되는 해였다. 그래서 94년 한 해는 일만 하기로 작정했다. 아파트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돈을 제법 모아서 그동안 진 빚도 갚았고, 동생 자취방 보증금도 올려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5년 2월 다시 학원을 찾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은 공부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면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지금도 그 교실의 하얀벽과 하얀 형광등 불빛을 떠올리면 애잔한 사랑의 추억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낄 만큼 그때의 새로운 상황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는 정신없이 공부했다. 학원에서는 물론이고 밥 먹을 때와 등하교 길에서까지 온통 공부 생각만 했다. 공부만이 내자신을 지탱하는 에너지였고 나의 모든 것이었다. 성적은 일취월장했다. 매달 모의고사를 치를 때 마다 점수가 10점씩 올랐다. 나는 신이 났다. 그땐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지도해 줄 사람도 없고, 참고서를 많이 살 만큼 넉넉지도 않았기에 교과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예컨대 국사교과서 같은 경우에는 수십번도 더 봤을 것이다. 교과서를 한자도 빠짐 없이 반복해서 읽으면서 기본적인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고 내것으로 만들어 가는 방식이야말로 수험공부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지난 5년간의 수험 생활은 힘들었지만 내겐 소중한 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잠재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 삶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꿈을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한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꿈은 이루어 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