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다시 독일에 왔다. 물론 그 사이 잠시 몇번 다녀갔지만 통일된 독일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한 학기 장기체류를 허락받게 된 것은 이처럼 오랜만이다. 그만큼 청천하늘의 별처럼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게 살아왔던 것이다.필자에게 독일은 학위과정을 밟느라고 청춘을 불태운 곳이기도 하여 어리둥절한 것은 없지만 이번에는 뭔가 새로우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는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과거와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독일은 그 사이 통일국가가 된데 반해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병상련의 두 나라중 독일보다 한국이 먼저 통일을 이룰 것이라고 장담하던 지난 날의 실언 때문에 독일인에게 속으로 겸연쩍음같은 것이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다른 무엇
그러나 확실히 독일사회도 낯설게 변화한 것들이 적지 않다. 어느 사회나 과거의 고유한 전통보다 국제화, 지구촌시대의 현대적 요소들이 현저해짐은 보편적 현상인 듯 하다. 고풍스런 도시 한 복판에 미국식 맥도널드가게가 파고드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도 훨씬 다양해졌고 다소 구질구질해 보인다. 과거의 정갈한 독일 맛이 안 나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 독일학자는 이것을 「느슨해짐」(Verwahrlosung)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가시적 현상들을 넘어서 독일사회를 현재 끌고 가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통일을 위해 쏟아붓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 여기에 왔다. 앞으로 자료도 모으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대화도 나눠야겠지만, 분명히 우리와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다른 점때문에 「독일은 독일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식의 자기폐쇄적 논리로 연결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실 필자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논리를 펴는 학자와 정치인들을 적지 않게 만나보았다. 이런 논리는 결국 한국이 아직도 분단국가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체념 내지 자기정당화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독일인들도 자기네처럼 서둘러 통일하지 말고 한국은 차근차근 준비하여 통일하라고 충고하는 여유도 보여준다. 그만큼 독일도 통일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체험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통일복구사업을 위해 국민의 세금에서 10%를 더 내는 통일부담금을 계속 실시해야 하느냐 절감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뜨겁게 논의되고 있고, 전동독총리 에곤 크렌츠에 대한 재판을 비롯한 법적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그보다 600만명에 이르는 실업인구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인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통일의식이 상당히 냉담해져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사회적·심리적 통일과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후유증의 문제는 양국가를 통합하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불가피한 부수적 현상일 것이다. 다른 민족은 몰라도 한국인은 이런 부정적 측면에 집착할 처지가 못된다. 통일후유증을 얘기하다가도 도서관에 들어가보면 한 마디로 그것이 기우요, 행복한 고민이라고 느껴진다. 통일된 90년이후에 나온 통일관계서적만 해도 수백권임은 물론 학술잡지들이랑 출판물을 보면 이전보다 훨씬 분량과 질이 좋아졌다. 요즘도 네오나치즘 얘기가 간간이 나오긴 하지만 독일인은 확실히 무섭게 우수한 민족 인 것같다. 대학에서 검소한 모습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바로 저것이 이들의 저력이구나 싶어 고개가 숙여진다.
정말 우리도 국내외 여건을 활용하여 한국인의 잠재력을 통일에로 승화시켜야 할 때이다. 이곳에도 한국신문들이 오기 때문에 국내소식을 곧바로 들을 수 있는데 솔직히 요즘 국내소식은 통일에는 아랑곳 없고 정치게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되는 집안의 아귀다툼같이 보인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여야 편가르기로 누구를 영입하고 말고 하는 짓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의미가 있으며 통일을 위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정치게임만 열중
오늘 아침에도 한 독일교수가 왜 아직도 한국은 통일을 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여 답하느라고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못난 민족」이라는 표현이 서로의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기가 민망스러웠다. 물론 통일은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 나가야 하지만 독일통일에서 배울 점은 배워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통일이 정치적 통합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독일이 웅변으로 가르쳐주고 있다면, 한국은 지금부터 아니 벌써부터 국내정치를 그런 방향으로 운영해나가야 했었다. 이미 통일을 이룬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의 원리」를 착실히 배워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 나가는 국민적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분단조국의 한국인으로 통일독일에 와 있는 필자의 곤혹스런 심정을 솔직히 적어보았다.―프라이부르크(독일)에서 <서울대교수·법사상사>서울대교수·법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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