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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1/판소리(한국의 예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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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1/판소리(한국의 예맥:5)

입력
1996.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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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녹여 혼을 토하는 세계적 「목소리예술」로/잔기교 없이 쭉뻗는 소리… 송흥녹이 효시/화려한 기교·장식이 특징… 박유전이 태두/김소희, 70년대초 카네기홀·유럽순회공연 본격 세계무대로판소리는 열린 장르다. 즉흥이 가능한 구조이다. 창자는 부르고 고수는 받고 관중은 추임새를 넣는다. 「한과 혼이 담긴 목소리예술」 판소리의 맥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긴장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고 뛰어난 제(바디를 가리키며 한 바탕의 짜임을 뜻함)는 세대를 넘어 전승돼 왔다. 그 음악적 완성도 덕분에 해외에서도 판소리를 수준높은 예술로 인식하게 됐다.

판소리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동편·서편·중고제의 유파 구분은 조선 순조무렵 이른바 8명창시대(19세기 초반)에 시작됐다.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등 전라도 지리산·섬진강의 동쪽에서 불렸고 송흥녹으로부터 형성됐다. 그는 동생 송광녹과 그 아들 송우룡, 또 그 아들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명창집안의 시조로 송만갑 유성준의 소리를 통해 동편제의 전통을 전했다. 송흥녹과는 다른 제를 형성한 김세종의 소리가 장자백 김찬업등에게 이어져 김세종제 춘향가가 지금도 많이 불린다. 정춘풍도 또 다른 제를 정립했으나 전승은 미미하다. 동편소리는 지리산의 기운 탓인지 발성이 신중하고 잔기교 없이 소리가 쭉 뻗으며 구절마다 끝맺음이 「쇠망치로 내리치듯」 확실한 게 특징이다.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등 지리산 서쪽의 소리로 박유전으로부터 전해 내려 온다. 화려한 기교와 장식이 많은, 만들어 부르는 소리다. 정교한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김채만-박동실, 정재근-정응민의 두 계열로 전한다. 박유전과 다른 제를 형성한 정창업의 소리도 김창환, 정정렬을 통해 일부 전해온다.

중고제는 두 제의 중간격이지만 동편제에 가깝다. 김성옥의 소리법제가 표준이며 김정근-이동백·김창룡등으로 이어졌으나 거의 맥이 끊겼다.

20세기 초반 5명창시대에 동·서편 소리는 섞이기 시작했고 송만갑 유성준 김채만 정정렬 김창환의 바디가 생겨났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송만갑은 서편소리인 정창업의 창제를 도입했다 해서 집안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조선후기 임금과 양반의 후원 덕분에 판소리가 고급한 예술로 발전하면서 임금 앞에 선 명창에겐 「3년동안 먹고 살만한」 녹봉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판소리의 주관객은 다시 서민대중이 되었다. 「쑥대머리」(춘향가 중)로 이름을 날렸던 림방울(임방울)등이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협률사를 통한 순회, 토막소리, 창극공연도 성했다.

광복후 50∼60년대는 판소리의 위기시대. 1940년대 이후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판소리는 창극운동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64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68년 박동진에 의해 완창발표회가 시도되면서 중흥의 계기를 맞았다. 김소희는 송만갑 박동실 정정렬 박록주등 많은 스승을 거쳤고 안숙선 신영희 이명희등을 가르쳤는데 70년대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유럽순회공연등을 통해 전문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보성에 은거한 정응민의 소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정응민은 박유전제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와 동편소리인 김세종제 춘향가등을 섭렵했다. 그 밑에서 정권진 박춘성 성우향 조상현 성창순등이 나와 다수가 활발히 활동중이다. 이 소리를 박유전의 호를 따 강산제라 부르는데 강산제는 소리바디가 좋고 사설도 격을 갖춰 고전적 형태에 가깝다.

또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최승희, 숙영낭자전은 박록주-박송희에게, 김연수가 짠 동초제 춘향가는 오정숙을 통해 이일주 조소녀에게 전한다. 김연수는 동편제의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배울 때 사설의 오자와 빠진 글자등을 문제삼았다가 호된 꾸중을 듣고 갈라서 서편제 정정렬문하에 들어갔다. 동편소리로는 박록주가 전수한 송만갑제 흥보가와 가장 동편제 원형에 가깝다는 강도근의 소리가 있다.

오늘날 판소리 맥잇기의 중심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다. 그러나 전승자의 기량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보유자지정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나도 맥을 이어가기 힘들다. 판소리에 대한 정규교육은 미약하기 짝이 없으며 판소리가 충분히 현시대를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인데도 창작이나 새로운 실험은 왕성하지 못하다. 80년대 전통민중예술을 사회변혁운동의 도구로 인식한 사람들에 의해 창작판소리가 발표되기도 했으나 생명력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창조적인 소리꾼은 그 시대의 기호와 감성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판소리를 아끼는 사람들은 새로운 「현대의 명창」을 대망하고 있다.<김희원기자>

◎명고수없인 명창도 없다/김명환·김득수 “북의 달인”/오성삼 주봉현 신찬문 장판개 한성준등이 고법체계 세워

일고수 이명창, 암고수 수명창이라는 말이 있다. 고수와 창자의 호흡을 중시한 말이다. 고수는 장단을 치는 것 외에 소리를 단속하고 이끌어야 한다. 창자가 자유롭게 박을 넘나들 때 박을 가늠하도록 각을 내며, 박이 빠르면 잡고 처질 때는 졸라맨다. 또 소리의 틈을 메우는 등 소리와 북의 대화를 통해 재미를 높인다. 때로는 사설을 잊어버린 창자를 돕기도 한다.

고수의 이름은 명창들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송흥녹의 제자 송광녹 주덕기는 원래 그의 고수였다. 장판개도 김채만 송만갑의 고수로 있다가 다섯 바탕 소리를 꿰었다. 고수는 여러 명창을 거치며 소리를 익혀 웬만한 창자보다 더 다섯 바탕소리에 훤한 경우가 많았다. 오성삼 주봉현 신찬문 장판개 한성준 같은 명고수들이 판소리고법의 체계를 세웠다.

현대의 이름난 고수로는 김명환과 김득수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중요무형문화제 59호 판소리고법 보유자이나 각각 89, 90년에 작고했다. 김명환은 줄타기를 하다가 떨어져 다쳤는데 김소희가 북을 배우기를 권유했다. 그는 장판개에게서 북을 배웠고 특히 앉는 자세, 북채잡는 법 등의 원칙에 철저했다. 김득수는 한성준고수에게서 북을 배워 50년간 박동진과 단짝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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