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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철의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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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철의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시평)

입력
1996.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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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 열망한 생의 무너져 내림생에 대한 물음이 곧바로 생의 붕괴를 확인하는 절차가 되는 때가 있다. 장례, 이별, 파산, 시한부 생명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나락에 빠지게 하는 수렁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그 수렁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어떤 두께의 암흑 속에서도 빛을 향해 튀어오르고야 마는 특이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누벨 옵세르바퇴르」지는 후천성면역결핍증환자들이 남은 생애동안 건강했을 때는 전혀 맛보지 못했던 강렬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가 있다. 그들은 죽음마저도 하나의 생의 기획으로 만듦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던 것이다.

하지만, 생의 붕괴가 어느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 그 자체가 온통 삶의 붕괴이고 죽음이라면? 그래서 죽음이 삶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음의 표지로서만 삶이 있다면?

윤재철의 「생은 아름다울지라도」는 바로 그 생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소리가 아니라 80년대의 변혁이념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집단적인 목소리이다. 아니, 그 사람들 전부의 목소리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신을 꾀하였다. 그 변신이 모조리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어코 변신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변신 못하는 사람들」이 몸의 「엄연함」을 어쩌지 못해서, 「텅 비인 가슴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어쩌지 못해서 기괴한 소리를 쉼없이 웅얼거린다.

그 목소리는 그 자체로서 목소리의 붕괴이다. 「변화는 어디에 있을까/붉게 도드라진 입술/살아 숨쉬는 말은 어디에 있을까/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땅의/향기는 어디에 있을까/노래하듯이 결단하는/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시구는 노래도, 한탄도, 하물며 분노도 아니다. 전망이 망실된 때에는 말도 살아 숨쉴 수가 없다. 시의 말은 실렁거리는 한담과 헛헛한 잡담들 속에서 고통스럽게 침묵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편들은 단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억눌린 피울음이다. 그 피울음이 생의 더러움에 절망해 꺽꺽거린다. 그러나, 제목을 보라. 「생은 아름다울지라도」가 아닌가? 그것은 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시인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믿음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생은 아름답다」가 아니라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이다. 이 양보절에 이어지는 말은 무엇인가?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끊임없이 피흘리는 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김수영이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고 말한 것보다 힘차지 못하지만 훨씬 더 고통스럽다.<정과리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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