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부 “영혼의 고향 분할 절대불가”/토지수용 계속에 「팔」주민 거센 반발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걸쳐 도도히 흐르던 평화의 물길은 여기서 소용돌이를 만나며 거친 거품을 토해낸다. 유다 광야가 끝나는 고원에 자리한 예루살렘은 3,000년의 역사를 원죄처럼 겹겹이 껴안고 있었다. 「다윗의 별」이 달린 유대 시나고그와 초승달 장식의 이슬람 사원, 십자가가 우뚝 선 기독교 교회가 뒤섞인 모양새는 신성함보다는 혼란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동예루살렘지역에 위치한 구시가는 얽히고 설킨 현 구도를 단층처럼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성벽에 둘러싸여 1㎢ 남짓한 좁은 면적에도 네 구역으로 쪼개져 있다. 유대와 이슬람, 기독교도가 각기 한 구역씩 차지하고 있고 남은 한 모퉁이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20세기초 터키치하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한 「환란」의 시기에 「구원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자는 한 예언자의 말에 따라 이 곳으로 흘러 와 자리잡은 내력이 있다.
이 성벽의 서쪽 한 귀퉁이가 이른바 「통곡의 벽」이다. 16세기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가 증축한 성벽밑으로 나타나 있는 7단의 돌벽은 3,000년전 이스라엘 왕 다윗이 세웠다는 도시의 유일한 흔적이다. 유대 휴일과 안식일(사바스)은 물론, 평일에도 수백명의 유대인이 모여 몸을 흔들며 통성기도로 메시아의 강림을 희구하고 있다. 67년 중동전 당시 동예루살렘지역을 장악한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국방장관과 이츠하크 라빈 총참모장이 벽앞에 서서 「눈물의 승전보」를 알리던 장면은 아직도 세인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이스라엘측은 이 전쟁의 전체 전사상자 중 16%에 달하는 값진 희생을 이 곳에서 치렀다.
그 위로 펼쳐진 곳이 다윗의 성전이 있었다는 「신전의 언덕」이다. 유대인들이 성전 복원을 빌고 있는 이 자리에 지금은 엘아크사 사원과 바위 돔이 자리잡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의 맨 끝땅」(엘아크사)에서 드리는 한번의 기도가 다른 지역의 4만번보다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 사원 한켠에는 과거 이 곳에서 서쪽벽의 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지다 이스라엘군 총격에 숨진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피묻은 옷가지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사랑과 용서」의 거룩한 전당에서조차 삭이지 못한 구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마주보는 황금의 바위 돔은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장소이자 세 종교의 공통된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곳이기도 하다. 그 북동쪽 자락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언덕, 비아 돌로로사(수난의 길) 등 기독교 성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마저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다. 예수의 무덤 자리에 세워졌다는 성분묘교회가 대표적 경우이다. 326년 건립된 이 교회에서는 성프란시스코파, 이집트 콥트교, 에티오피아교회 등 신·구교 각파들이 한 쪽씩을 차지한 채 각각 다른 예배의식을 올리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마호메트가 바위돔 「천국 타일」에 19개의 황금 못을 박았는데 모든 못이 없어지면 우주는 이전의 「혼돈」상태로 되돌아 간다. 아직 못은 3개가 남아있었지만 이미 혼돈은 시작돼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갖는 애착은 대단해 보였다. 『예루살렘 없는 우리는 영혼이 없는 몸뚱이일 뿐이다』이스라엘의 국부 다비드 벤구리온의 말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예루살렘 주변에서 강행되는 토지수용책이다. 한편으로는 땅을 반환하면서도 베하니나, 베사하하 등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국제적인 비난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 계속 「뺏고」 있는 모순된 정책이다. 이른바 「대예루살렘」건설의혹이다. 로이터통신의 프리랜서기자 룰라 할라와니는 『예루살렘을 영구 수도로 삼기 위해 필요한 「완충지대」』라면서 『이스라엘에 동예루살렘 반환이라는 카드는 당초부터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20일 실시된 자치선거에서 팔레스타인 행정수반에 선출된 야세르 아라파트는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초석이 놓여졌다』고 강조했다. 이에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 『예루살렘의 「베를린화」는 절대 불가』라고 응수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창설문제는 아직은 협상의 대상이라는 꼬리를 달았다. 양측간 타협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예루살렘 지위와 관련,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조심스레 결집해 나가는 구상은 「정치는 폐쇄, 종교는 개방」정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5월에 개시될 「팔레스타인 최종지위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창설을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 받을 것이란 예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원적 해결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2,000여년전 이 도시를 다스렸던 솔로몬의 지혜가 어느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이다.
◎예루살렘은 어떤곳/67년 「이」 서 완전점령 영구수도선포/「팔」도 수도구상… 중동평화 최대쟁점
47년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내 유대, 아랍 두 국가의 창설을 약속한 유엔 결의안 제 181조에서 예루살렘을 국제 관할로 둔다고 명시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등 세 종교의 성지라는 종교적 특수성을 고려한 타협안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에는 올해 성도 3000년을 맞은 「다윗의 도시」이고 이슬람에는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3대 성지이며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 고난을 받은 곳이기에 그만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아 왔다. 이때문에 19세기 오스만 터키와 서방측은 「성지에 관한 현상유지 협정」을 체결, 성지 보호와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했으며 이 협정은 지금도 유효하다.
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일어난 1차 중동전으로 도시는 동·서 예루살렘으로 분단됐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이스라엘이, 동쪽은 요르단이 장악했다. 이어 67년 3차 중동전을 통해 동예루살렘마저 점령한 이스라엘은 합병선언과 함께 예루살렘 전체를 영구적인 수도로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당시 아랍측이 유엔 결의안 181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위를 규정한 이 결의안의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자국 대사관도 텔아비브에 두고 있다.
팔레스타인 또한 동예루살렘을 장래 탄생할 독립국가의 수도로 선포했다. 이스라엘측은 예루살렘의 재분단, 즉 「베를린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성지 관할권등 연고권을 지닌 요르단은 올해 그 권리를 팔레스타인에 양도한다고 천명,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하는 등 예루살렘 문제는 남은 중동평화 진척과정중 최대 쟁점으로 부각돼 있다.
◎슈하트 이스라엘 재무장관/“중동평화 경제도 이익”/최근 5년수출 50%이상 신장/주변 회교국들과도 교류확대
『중동 평화 과정은 현실적인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 슈하트 이스라엘 재무장관은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국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이유의 하나는 경제적 요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금까지의 평화진전만으로도 얻은 경제적 이익은 지대하다』면서 『91년 마드리드 평화회담이후 5년간 수출이 50%이상 신장했고 경제성장률은 연 6%를 상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과의 자치협정을 확대해 나가면서 이른바 「비토국」이던 걸프 및 북아프리카 회교국과의 교류도 증대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근 튀니지와의 관계 개선을 한 예로 든 그는 『팽창하는 경제규모에 따라 국내 경제 구조를 전면 조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슈하트 장관은 또 중동 평화정착의 관건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경제 자립을 위해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92년 고 이츠하크 라빈 정부 출범시 입각한 그는 중동 경제회담에 이스라엘측 협상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슈하트 장관은 『이스라엘의 목표는 주변국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며 경제개방을 가속, 세계경제속의 이스라엘을 만들자는 것』이라며 『새로운 시장과 투자 기회를 확대하고 전략적 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도 전략 지역중 하나』라고 꼽은 그는 특히 마케팅과 산업기반이 우수한 한국과 이스라엘은 서로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노동당 의원인 그는 16∼18일 이스라엘 재무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한 바 있다.<예루살렘=윤석민특파원>예루살렘=윤석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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