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사회가 낳은 또 하나의 불행 「소비광」/“쇼핑 안하면 금단증세 시달린다”/“자신과의 싸움 이길 용기를 주소서” 기도로 시작/노신사·귀부인에서 청바지20대까지 계층도 다양/산더미 카드빚에 “파탄” 비밀정기모임만 100여개세계 최고급 상품매장들이 몰려있는 쇼핑의 메카 뉴욕 맨해튼 5번가는 연말연시가 지난 요즘도 양손에 물건을 가득 든 쇼핑객들로 북적댄다. 그러나 이곳에서 불과 몇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무분별한 소비로 생활파탄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알코올 도박 니코틴처럼 과소비를 끊지 못하는 이른바 「과소비증후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비밀모임인 「익명의 채무자 모임(DA:Debtors Anonymous)」을 찾아 봤다.
지난 화요일 낮 12시30분. 파크애비뉴 50가의 성 바르톨로메오성당 4층 구석진 회의실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DA?』 『예스』. 모임을 알리는 푯말이나 안내자도 없었지만 암호같은 문답으로 모임을 확인한 참석자들은 둥그렇게 의자를 놓고 둘러앉았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있는가 하면 귀부인차림의 중년부인, 학생티를 벗지 못한 청바지차림의 20대… 외모만으로는 이들을 한데 묶을만한 단초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들은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할 소비로 인해 오히려 생활이 파탄지경에 이른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앨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신사가 사회를 자청하고 나섰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하는 것으로 모임은 시작됐다. 『우리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옆사람을 꼭 잡은 손들을 통해 중병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참석자들을 휘감아 돌았다. 기도가 끝나자 이들은 「절제된 생활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비슷한 처지의 주위사람들에게도 모임참가를 적극 권장한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12 수칙」을 돌려가며 낭독했다. 이어 현재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는 마이크씨가 신앙간증과 유사한 기조발언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하루 200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던 고급레스토랑 바텐더시절의 소비벽이 수입이 줄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쓰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했고 스스로가 초라해 보였죠. 자연히 집세나 카드대금이 밀리기 시작했고 이를 갚기 위해 주위사람들에게 거짓말로 둘러대 돈을 꾸어쓰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됐습니다』 5년전부터 이 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그는 지금은 빚은 지지 않고 저축도 조금씩 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완치」됐다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고 했다.
1시간남짓 시간이 흐르는 사이 참석자는 남자 8명 여자 11명 총19명으로 늘었다. 1명의 흑인여성을 제외하곤 모두 백인이었다. 각자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4분발언시간.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름(가명)뒤에 꼭 『나는 채무자입니다』라고 덧붙인다. 자신의 문제를 자인하는 데서부터 재활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캐이터링에 종사한다는 미모의 30대 여성은 『여기 앉아 있는 것이 비참하지만 평생을 더 비참하게 살지 않기 위해 이곳에 나온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젊은 흑인여성 트리샤는 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이래 석달째 흑자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지만 자신을 감시하고 채찍질해 줄 「압력자」가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했다. 모임이 끝날 때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앨런이 쪽지를 건네줬다. 흘끗 건너본 쪽지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앨런이 트리샤의 「압력자」를 자청한 것이다.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람에겐 박수를 쳐주고 울먹이는 사람과는 위로의 말이 오가면서 모임은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같은 시각 성마가렛성당 도서관, 나자렛교회에서도 모임이 열린 것을 비롯,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기모임만 매주 100여개에 달한다. DA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모임(AA)」에서 조직형태와 운영방법을 그대로 따온 전국적인 조직이다. 전화메모나 우편을 통해 모든 업무와 연락을 취하고 회원과 단체에 대한 정보의 공개를 꺼리는 것도 AA와 마찬가지다.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진 DA사무본부 역시 회원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6∼10달러씩 하는 회원용 교재대금 등으로 최소한의 연락업무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DA가 회원들에게 발송하는 우편물에 기재된 정기모임의 수는 갈수록 늘어만 간다.<뉴욕=김준형특파원>뉴욕=김준형특파원>
◎전문가 진단/소비광은 대부분 “화이트칼라”/평균연령 38세… 우울증 동반… 약물치료 효과보기도
미국의 사회병리 전문가들은 「쇼퍼홀릭(숍+홀릭)」 「스펜더홀릭(스펜드+홀릭)」등 소비광을 일컫는 단어가 결코 과장된 어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필요와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물건을 사들임으로써 만족감을 얻고자 하지만 결국은 심각한 생활장애로 고통받는 모습은 「과소비증후군」으로 일반화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위가 메슥거리고 나날이 쌓여가는 빚더미에 대한 생각에 한없이 우울해지고 전화받기도 두려워진다』「채무자들의 성경책」으로 통하는 「빚으로부터 해방돼 행복하게 사는 법」이라는 책을 쓴 제리 먼디스씨가 한때 카드빚이 5만달러에 이를 정도로 무절제한 소비생활에 빠져있던 당시의 경험이다. 이정도로 심각한 자각증세가 나타나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 쇼핑을 하면서 판매직원들이 보여주는 존경심과 정성어린 접대에 고무되고 거래가 성사돼 돈을 치르는 순간의 희열을 만끽할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심각한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심리학자로 「과소비하는 여성들」이라는 책을 쓴 캐롤린 웨슨씨는 『심지어 크레디트카드기계가 자신의 카드를 승인하는 순간 들리는 「드르륵」하는 기계음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쇼핑을 마음껏 하지 못하면 우울해지고 점점 쇼핑의 강도와 우울증의 증세가 심화해가며 두통 소화불량 등 육체적 증상이 따르게 되면 과소비증후군 환자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신시내티주의 정신과의사 수잔 맥앨로이씨는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서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소비를 택하고 있지만 과소비는 우울증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상승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맥앨로이씨는 이들 「과소비증후군」환자들에게 항우울증 약물치료를 실시, 효과를 거둬왔다고 말했다.
과소비증후군은 뜻밖에도 교육받은 중산층들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90년대 초반 법원에 파산신청을 한 2,300명에 대한 분석을 실시한 텍사스대 법학교수 제이 웨스트브룩씨는 『이들의 평균 나이는 38세로 대부분 대학교육이상을 받은 화이트칼라였다』고 말했다.<뉴욕=김준형특파원>뉴욕=김준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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