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뭐길래」라는 TV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날렸던게 바로 4년전 이맘때였다. 언어의 연금술사로도 불렸던 인기 여류드라마작가가 한 자린고비 집안과 신세대 집안간에 혼사가 이뤄지기까지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코믹하면서도 훈훈한 여운을 깔고 전개해 TV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당시 그 드라마 덕택을 톡톡히 본게 극중에서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했던 원로탤런트와 무명가수였다. 총선에서 한차례 낙선했던 그 연기자는 그 드라마 인기 탓인지 14대 총선에 거뜬히 당선됐는가 하면 20년 무명가수의 「타타타」란 노래가 극중에 소개되는 바람에 덩달아 크게 히트한바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연기자도 이번 15대 총선에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한바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너무나 잦은 놀라움과 엎치락 뒤치락 하는 꼴을 보여줘 「도대체 정치가 뭐길래」라는 푸념과 원망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게 필자에게 그 드라마를 갑자기 연상시킨 이유이다. 이참에 또하나 떠오른게 그 언어의 연금술사로 하여금 「정치가 뭐길래」라는 드라마를 써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뭐길래」라는 단어처럼 감칠맛 나는 반어법도 드물다. 「뭐길래」라는게 겉으론 빈정거림이나 푸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끝없는 애정과 연민과 기대를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이 뭐길래」에서 참사랑을 정의했던 것처럼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웃음기마저 담아 「정치가 뭐길래」를 쓰게 해 무한정 혼탁한 우리의 몹쓸 정치를 한번쯤 정화시켰으면 하는 욕구가 솟구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반어법적인 애정을 버린채 오늘의 우리 정치를 정의해 본다면 너무나 드라이해 살벌하기조차 할 것이다. 요 몇개월동안 전개된 정치란게 두 전직 대통령의 교도소행으로 상징되듯 실정법상으로는 특가법위반의 무기징역·사형감인 것이고, 도덕적으로는 나라의 권위나 사표가 일시에 지옥으로 전락하는 가치체계의 전면 와해이고 철석같은 약속도 하루아침에 깨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이나 조직질서의 측면에서는 어제의 적과 동지가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바뀌는 이합집산과 제휴 및 보복의 물고 물리는 아수라장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악연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종교에서는 이처럼 모질기도 한 인연을 인업으로 정의한다. 불교의 대일경을 보면 『인은 거울과 같고, 업은 몸과 같아서 거울을 대하면 영상이 나타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 정치의 영상이란 나라발전을 가로 막고 국민심정을 이지러뜨리는 것이기에 한마디로 매타작감이다. 현실적인 매타작 방법이란 유권자의 표를 통한 보복이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 행정부 출범 직후 의회를 여소야대로 공화당에 유린당한 사태를 두고 언론에서는 「유권자의 해일」(tsunami)로 일찍이 표현한 바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몹쓸 정치의 망집에 무한정 사로잡혀 있을때 결코 남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잇단 충격적 정치드라마에 이끌려 일희일비 하다 보면 언제나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한발짝 떨어져서 「뭐길래」하는 심경으로 차분히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맹목적 사랑과 과보호가 귀한 자식을 망치듯 지나친 관심이 정치를 저꼴로 만든 원인이 되었음도 인정할 때인 것이다.
「정치가 뭐길래」라는 애정어린 투정을 받아줄 여유있고 여운을 남겨주는 정치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최근 우리는 그 편린을 나라밖에서 훔쳐본바 있다. 눈을 감기전 「찻빛 장미와 붓꽃 한다발」이면 족하다는 유언을 남긴 프랑스 전대통령 미테랑. 공산주의와 싸워 자유를 쟁취한 어제의 민주투사에서 대통령자리에 앉았다 옛 그단스크조선소 자유노조고문으로 되돌아간 폴란드 전대통령 바웬사. 그리고 어제의 중동전쟁승리 맹장에서 오늘엔 중동평화정착의 기수로 헌신하다 산화한 라빈 이스라엘전총리 등이 국민들에게 남긴 가슴 촉촉한 정치적·인간적 여운을 우리는 부러움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런 훈훈한 드라마가 우리의 현실 정치에서도 실제로 펼쳐질 날은 과연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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