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처럼 생각하는 사물 만든다/감정반응 컴퓨터·물품주문 냉장고 등 실용화 총력찰스강을 사이에 두고 보스턴과 마주 바라보는 미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즈에 위치한 매사추세츠공대(MIT).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소들이 즐비한 MIT에서도 미디어연구소(Media Laboratory)는 가장 독특한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규모로 보자면 교수진 26명, 석박사과정 연구원 93명으로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높이 4층의 연구소 빌딩도 단조로운 흰색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건물이다.
연구소하면 으레 떠올리는 삼엄한 경비도 없다. 정문 입구는 물론 어느 층, 어느 구역에도 방문객의 신분을 확인하는 직원이나 절차가 없다. 각 연구실도 완전히 개방돼 있어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다.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첨단」의 기미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허술하고 무질서한 인상까지 풍기는 이곳은 전세계의 뉴미디어 관련자라면 누구라도 첫손에 꼽는 「멀티미디어의 미래이자 비전」이다.
MIT 미디어랩이 하는 일은 대부분 미로처럼 복잡하고 더러는 황당하다. 교수 1명에 하나인 26개의 프로젝트와 연구원 1명에 1개 남짓한 116개의 토픽은 종횡및 대각선으로 얽히고 설켜 있다. 독한 맘 먹고 덤벼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프로젝트와 토픽들은 대별하자면 서로 겹치는 3개의 원(분야)으로 묶을 수 있다. 첫번째 원은 학습과 상식이다. 멀티미디어란 결국 사람과 기계가 가장 편한 상태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양자 모두 어떤 식으로건 자기학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범주는 인간과 컴퓨터의 학습과정에 대한 연구가 목적이다. 두번째는 인지하는 컴퓨터다. 첫번째 원이 학습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두번째 원은 정서에 주목한다. 사용자의 감정이나 정서에 따라 반응하고 그에 따라 대처하는 컴퓨터를 연구한다. 세번째는 정보와 오락이다.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소유하게 될 것인가, 영화와 방송 등 미래의 오락은 어떤 방식으로 발전될 것인가를 연구한다. 보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내용과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바꾸는 대화형 영화(Interactive Cinema)등이 여기서 연구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연구는 한가지 궁극적 목표에 귀결한다. 「현재의 제약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의 복지와 개인의 만족을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발명하고 창조적으로 응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미디어랩의 헌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디어랩의 연구과제는 일반기업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유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 주문하는 냉장고, 양손 가득 물건을 들었을 때 저절로 작동되는 현관문 손잡이, 주인의 기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신을 차단하거나 다음에 걸어줄 것을 요구하는 전화기…. 당장 돈 될 것도 아니고 도대체 결과물을 볼 수 있을지 여부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랩 예산의 거의 전부가 기업 돈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미디어랩의 연간예산 2,500만달러(약 197억원)가운데 95%는 100여업체가 댄다. 스폰서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 AT&T 소니 ABC 뉴욕타임스 혼다 나이키 등 컴퓨터에서 통신 가전 신문 방송 자동차 스포츠용품업체까지 망라돼 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 LG전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이 돈을 댄다.
지역적으로는 미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가 46%, 유럽과 동남아가 각각 27%다. 미국내 대부분의 비영리연구소가 정부예산을 주재원으로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미디어랩은 확실히 별종이다. 기업이 미디어랩에 돈을 대는 것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곧바로 실용화하는 제품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디어를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연구라도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미디어랩의 또다른 특징은 연구원을 선발하는 데 전공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전공자는 물론 사진작가 영화감독 음악가 미술가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연구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컴퓨터 전공자들도 예술부문등에 일정이상의 지식을 갖추고 있다. 전공에 얽매인 경직된 사고로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는 멀티미디어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다.
지난해 10월10일 창립 10주년을 맞은 미디어랩이 이제까지 이룬 성과에는 크레디트카드의 ID에 쓰이는 홀로그래피와 컴퓨터로 작동하는 로봇 레고 등 실제 제품에 사용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큰 업적은 멀티미디어의 개념을 창출하고 그 비전을 제시해왔다는 것이다.
미디어랩의 설립자이자 소장인 니콜라스 니그로폰테교수가 연구소를 세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무리도 아닌 것이 니그로폰테 자신이 『미디어랩은 꿈꾸기 위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꿈은 10년이 지난 지금 더많은 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러 미디어가 통합돼 개인마다 가장 적합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는 멀티미디어의 미래는 이 꿈들 속에서 열리고 있다.<보스턴=홍희곤특파원>보스턴=홍희곤특파원>
◎재원조달 어떻게하나/기업 지원·기부금으로 예산 95% 충당/연구결과 로열티받아 운영에 보태기도
미디어 랩은 다른 어떤 연구소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재원조달 방식을 갖추고 있다. 예산의 95%를 차지하는 기업 스폰서는 크게 3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단일업체로부터 특정 프로젝트에 관한 예산을 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단기 프로젝트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경우 돈을 댄 기업이 지적재산권등 연구결과에 대한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
기업은 연구소나 연구원에 대한 로열티도 일체 지불하지 않는다. 연구소는 연구자체와 연구에서 파생된 다른 연구에의 기여만을 성과물로 갖는다. 철저한 비영리방식이다.
두번째는 컨소시엄이다. 한 프로젝트에 여러 기업이 연합해 돈을 대고 특정 결과물에 대해 로열티를 내는 것이 다를 뿐 첫번째와 다른 모든 「계약조건」이 동일하다.
미디어 랩이 하고 있는 작업중 알짜배기가 모인 곳으로 현재 「미래의 뉴스」 「내일의 TV」 「생각하는 사물(Things That Think)」프로젝트 등이 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세번째는 기부다. 개별 연구가 아닌 연구소 자체에 매년 일정액(최소 10만달러)을 헌액하는 방식이다. 앞의 두 방식과 달리 특정 결과물의 지적재산권에 대해 6개월이 지나야만 권한을 가질 수 있다. 로열티도 내야 한다.
◎인터뷰/니그로폰테 미디어랩 소장/“사고의 틀 해방,젊은 연구원 전공불문 발탁”
니콜라스 니그로폰테 MIT 미디어랩소장은 연중 48만를 여행한다. 1년에 6개월가량 세계각지를 떠돌며 지낸다. 그는 미디어랩에 집무실이 없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접촉은 가능하다. 전자우편을 통해서다. 그는 전자우편 응답에 하루 3시간을 쓴다. MIT건축학과 출신인 그는 컴퓨터나 엔지니어링에 관한 어떤 학위도 갖고 있지 않다. 멀티미디어 개념의 창시자이자 전도사인 그와 전자우편을 통해 인터뷰했다.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프로젝트는.
『생각하는 사물(Things That Think)프로젝트다. TTT는 간단히 말해 인간처럼 생각하고 상호접촉하는 기계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미디어랩의 대표적 특장은.
『미디어랩은 연구소 기능뿐 아니라 학구적인 프로그램에도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매년 연구원중 20%가 바뀌며 새로 들어오는 인원들은 20∼25세이다. 연구소가 언제나 젊은 것이다. 미디어랩은 또 다양한 교육배경을 가진 연구원들로 구성돼 있다. 연구원의 50%는 비컴퓨터과학자 출신이다』
―인쇄매체의 미래는.
『디지털세계에서 인쇄매체는 더이상 의미있는 개념이 아니다. 물론 「활자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활자 역시 「비트(Bit)」로 존재할 것이다.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걸러져 뉴스라는 원자안으로 들어갈 지는 독자가 결정하게 된다. 신문사는 뉴스를 취급하는 곳이지 종이를 취급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미디어랩의 대표적인 업적은.
『미디어랩의 가장 큰 업적은 현재까지 미디어랩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 많은 업적들이 있었지만 연구실의 한 전형으로서 미디어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고 성공적인 업적이다』
―미디어랩의 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인간의 이해력」에 대한 이해력 부족이 가장 큰 장애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력에 대한 잠재성을 잘 믿지 않는다. 우리는 기계를 상식을 가진 시각으로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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