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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근대문학/제도로서의 근대성과그문학:1(‘신문학사탐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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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근대문학/제도로서의 근대성과그문학:1(‘신문학사탐구’:1)

입력
1996.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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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학 문체도 기차처럼 직수입/신소설「혈의 누」/한자위 토달기/쉼표 등 일본것 이식/창조파 김동인의 「약한자의 슬픔」도 주인공이름 국적불명/우리 근대문학 「일본것」 아니라 일통한 “근대성 수용”문학평론가인 서울대 김윤식교수가 집필하는 96문학의 해 특별기획 「김윤식의 신문학사탐구」가 12일부터 격주 연재된다. 김교수는 제1부 근대문학, 제2부 해방공간, 제3부 6·25이후로 나누어 우리나라 신문학이 싹터서 꽃피고 열매맺는 과정을 주인과 손님의 대화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편집자주>

(객):병자년이 문학의 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람직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부터 해볼 수 없겠습니까.

(주):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에서 초연할 수야 없겠지요. 의무이기도 하지만 권리의 일종이니까. 다른 종류의 예술과는 달리 문학이란 썩 까다롭다는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객):음악이나 미술과는 달리 문학은 문자(말)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될 부분이겠지요. 저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의 표현을 빌리면, 색깔이나 소리에는 갓난아기도 반응하지만 말의 해독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이것은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장·단점이기 이전에 운명이지요. 말이란 넓게는 민족어에서 출발되는 것이지요. 민족 또는 국가단위의 언어세계가 문학의 모태인 만큼 이 사실을 잘 음미해 보는 것도 문학의 해를 풍요롭게 하는 한 가지 과제로 볼 수 없을까요.

(객):우리 근대문학이 형성된 것은 여러 가지 논점이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19세기말에서 금세기 초엽으로 보겠지요. 이러한 논의에서 제일 먼저 제기되는 것이 근대성이랄까 근대화라는 개념이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선 이 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요.

(주):매우 단순한 도식입니다. 근대란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Nation-State)의 완성과정,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과정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두 과정이 따로따로 전개될 수는 없지만 좌우간 이 두 중심축을 떠나면 인류사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없겠지요.

(객):불행히도 우리의 경우 이러한 근대성을 향한 역사전개의 과정에서 식민지화의 길을 걷지 않았던가요.

(주):위의 두 축이 이른바 보편성으로서의 근대성이라면 우리의 경우는 이 보편성과 아울러 특수성으로서의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이라는 두 축이 첨가되었던 것이지요.

(객):선생께선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극히 상식적인 도식을 내세우고 있군요. 단지 설명의 방편으로서입니까? 아니면….

(주):설명의 방편입니다. 워낙 역사란 복잡한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그 해석에는 방편적인 적용단위랄까 설명모델이 불가피한 까닭이지요. 만일 새로운 세대가 우리 근대문학사를 공부한다면 어떤 현상에 대한 그동안의 설명모델이 지나치게 제한적이었음에 주목할 것입니다.

(객):선생의 저술을 포함한 선행 연구자들의 설명모델이 썩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뜻이군요. 그들을 그렇게 초조하게 한 것은 아마도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극체제가 무너진 마당에서라면 그러한 초조감이 썩 풀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 요. 신문학사에 대한 다양한 설명모델이 요망되는 시점에 우리가 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주):우리 신문학사의 문체부터 한번 살펴볼까요. 문체란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전대의 문체와 신문학의 문체란 두 세계관의 차이에 각각 대응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학에서 그 문체란 증기기관차 모양 직수입되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객):근대란 그러니까 제도로서 수입되었다는 것. 선생께서 자주 주장해온 「제도」로서의 근대라는 설명모델이겠군요.

(주):사례부터 한번 살펴볼까요. 누구나 우리 신문학사의 머리에 신소설이 놓여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지요. 특히 이인직의 「혈의 루」가 그러합니다. 이 작품의 첫 머리는 다음처럼 시작됩니다. (「만세보」,1906.7.22)

다음 네 가지에 주목할 것입니다. (1)국한문혼용체라는 점 (2)쉼표로 띄어쓰기가 되었다는 점 (3)한자 위에 토달기 (4)「일청전쟁」이라는 표기.

(객):이 네 가지 지적사항이란 실상 일본의 소설문체의 철저한 이식이군요.

(주):그렇습니다. 특히 (3)을 보십시오. 한자 위에 토달기란 이른바 일본의「루비」라는 것이지요. 이뿐이 아닙니다. 다음 사례를 보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만세보」, 1906.8.25)

(객):오양(옥상)이라든가 어낭양(오조상)이란 일본어가 아닙니까?

(주):그렇습니다.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간 이인직은 정치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도신문사 견습기자 노릇을 한 바 있지요.

(객):정치공부는 그만둔 것이었던가요?

(주):그렇지 않습니다. 신문사에서 진짜 정치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까닭이지요. 일본 특유의 정치소설(Staatsroman)이 신문에 실렸던 것입니다. 의회정치를 시행하는 일본 근대국가의 정객들은 그들 정당의 이념을 소설로 나타내었던 것. 이른바 정견발표 형식의 소설이 유행했던 것입니다. 「경국미담」(1883), 「가인지기우」(1885), 「설중매」(1886)등이 모두 이런 부류에 드는 것입니다.

(객):일본 특유의 정치소설을 공부한 것이 이인직이라면 그는 제대로 정치공부를 한 셈이군요.

(주):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귀국한 그는 방향을 잃게 되지요.

(객):의회정치의 가능성이 없고 일제식민지로 편입될 처지의 조선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통감정치에 가담하는 일이었겠군요.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까지 지냈으니까. 그 점은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주): 「혈의 누」가 정치소설이라는 점이 궁금하다는 뜻이겠지요. 정치소설이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정치적 의도와는 무관한 내용이니까. 또한 같은 표제를 단 일본작가들이 쓴 「혈 루」와도 거의 관련이 없지요(이런 제목의 소설이 일본에도 여러 편 있었다).

(객):선생께선 다만 문체에 주목해 보자는 뜻이군요. 증기기관차 모양 혹은 학교제도나 군사제도 모양 신소설도 「제도」로서 수입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군요.

(주):그까짓 신소설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괄호 속에 넣고 건너 뛰면 되지 않겠는가. 또는….

(객):…….

(주):소설이야말로 「참 예술」이며 이광수 문학 따위의 계몽주의를 거부하면서 출발한 창조파의 두목 김동인은 어떠했던가.

(객):「약한 자의 슬픔」(1919) 말이겠군요.

(주):그렇습니다. (「창조」, 1919.2)

여기에서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형」이 도입되었고 마침표까지 사용되었지만 주인공의 이름이 강엘니자벳트 또는 K남작등 국적불명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객):그러고 보니 언젠가 선생이 지적한 김동인의 회고록 한 대목이 떠오르는군요.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되지만 쓰기는 조선글로 쓰자니…」(「문단 30년사」)라는 대목. 그러니까 일본말로 구상한 것을 조선말로 번역한다는 투라고나 할까요.

(주):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러한 형편은 우리 근대소설의 진정한 주춧돌이라 평가되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에 오면 한층 철저함에 놀라게 됩니다.

(객):도쿄유학에서 돌아온 X라는 청년이 남대문역을 나서 남포에 들르고 김창억이라는 광인을 만나고, 북국 한촌까지 간 긴 여로를 다룬 것이 「표본실의 청개구리」 아닙니까.

(주):그렇습니다. 중편급의 길이를 가진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체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개벽」, 1921.10)

(객):「피」라든가 「피녀」란 일본말 아닙니까. He와 She에 해당되는 말을 그들도 메이지(명치)기에 급조한 것인 줄 아는데.

(주):….

(객):이제 짐작이 갑니다. 우리 근대문학도 철도, 행정, 학교제도등과 같은 제도의 일종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

(주):염상섭의 경우 그가 다룬 지식인의 자의식이란 실상 염상섭에게 그런 고민이 있었다기보다 일본 근대소설이라는 제도가 지닌 지식인의 자의식이 염상섭으로 하여금 고민의 문학을 낳았던 것이지요.

(객):제도가 의식을 낳는다는 미셸 푸코의 방법론을 선생께서 지적하는군요.

(주):감옥제도의 발명이란 실상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켰다는 시각이지요. 요컨대 설명모델의 하나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객):그러니까 저러한 일본식 문체의 직수입이란 실상 「일본것」이 아니라 일본이 수용한 근대성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선생께선 지적하고 있군요.

(주):증기기관차란 서양의 발명품 아닙니까. 소설이 시민계급의 발명품이듯이.

(객):시민계급이란 그러니까 프랑스혁명과…. 그러면 다시 이데올로기문제로 되돌아가겠군요.

(주):오늘은 일단 이쯤에서 멈추면 어떻겠습니까. 편석촌(김기림)이 진짜 근대주의자이자 동시에 근대주의를 초극하고자 한 시인이라 불렀던 이상의 초기작품들, 가령 「선에 관한 각서」 따위가 일어로 씌어졌다는 사실도 모종의 설명모델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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