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현대정치사에 큰 발자취/사회주의이념 신봉 투쟁과 좌절속 실천 힘써/“나의 삶에 긍지” 퇴임의 변… 국민 존경 한몸에8일 서거한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은 현대 세계정치의 거인이자 위대한 유럽인이었다. 그는 지난해 5월 프랑스 역대대통령으로서는 가장 긴 14년 동안 지켜온 엘리제궁(대통령 관저)을 떠나면서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으며 내 자신에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귀거래사를 남겼다. 그는 이 말이 결코 헛되지 않을만큼 치열하고 위대한 삶을 살았으며 프랑스인들은 거기에 어울리는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보냈다.
퇴임 직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들은 그를 샤를 드골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꼽았으며 공과를 떠나 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일생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과 이를 위한 투쟁과 좌절, 유럽통합에의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스의 좌파를 규합, 71년 사회당을 창당한 미테랑은 꼭 10년만인 81년 3수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좌파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는 집권후 곧바로 은행 석유 철강 등 기간산업의 국유화, 주당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사형제도 폐지등 사회당 이념을 현실정치에 실천했다.
그러나 제2 석유파동과 국내 자본가의 반발 등에 부닥쳐 이 실험은 거듭 좌절을 겪었다. 이 여파로 사회당은 86년과 93년 총선에서 패배, 「좌파 대통령에 우파 내각」의 코아비타시옹(좌우동거내각)체제가 그의 재임중 두번이나 벌어졌다. 80년이후 사회주의의 퇴조 물결 속에 자신이 만든 사회당의 몰락을 직접 지켜보고 내각에 이어 엘리제궁까지 우파에 넘겨줬다는 점에서 그는 불행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내치의 실패에도 불구, 그가 88년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헬무트 콜 독일총리와 협력해 유럽통합의 이념을 현실로 이끌어낸 외교적 성과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중도노선으로 유연하게 방향을 선회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그는 콜총리와 함께 유럽통합을 주도한 쌍두마차로 콜 총리는 그의 퇴임을 『위대한 유럽인의 퇴장』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1916년 서부 프랑스 샤렌트의 유서깊은 도시 자르낙에서 철도역장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2차대전에 참전,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뒤 귀국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앞서 잠시 나치의 괴뢰였던 비시정부에 협력, 퇴임직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로서 또 이상주의자로서 그의 신념은 레지스탕스 시절 굳게 다져진 것이며 부인 다니엘도 이때 동지로 만났다. 그는 다니엘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그리고 20년전 혼외정사에서 딸 하나를 얻었다.
미테랑의 정치경력은 종전 직후 30세로 하원에 진출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47년 최연소 장관으로 입각한 그는 우파정권하에서 12개 장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58년 드골대통령이 대통령 권한 강화를 위해 개헌을 하자 이에 반대, 야당의 길을 택했다. 『드골을 존경하지만 프랑스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전력과 대통령 재임 중 노선수정등으로 그는 신념의 정치인이 아닌 권모술수형 정치인으로 혹평을 받기도 한다.
그는 문학과 철학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즐겼으며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지도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퇴임직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피력했는데 그의 서거에 쏟아진 애도의 물결은 그 꿈이 이미 이뤄졌음을 보여준다.<오미환기자>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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