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백암성(한문화 원류 기행:12·끝)

알림

백암성(한문화 원류 기행:12·끝)

입력
1996.01.05 00:00
0 0

◎고구려­당격전지엔 굵은 빗줄기만/중 대륙진출 3대요충 전초기지/성아래 평원·산맥이 멀리 달리고/아직도 견고한 성벽엔 망국의 한서려광활한 만주대륙에 살아 있는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찾는 여정은 아쉽게도 백암성에서 멈춰야 했다. 태자하(타이즈허) 유역을 따라 세워진 백암성은 평야에 따로 떼어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솟아오른 산의 분지둘레를 막은 성으로 요동성 안시성과 더불어 고구려가 중국대륙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은 3대 요충지.

백암성은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성 가운데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전돼 고구려의 빼어난 축성술을 엿볼 수 있다. 백암성 서쪽으로 30 떨어진 요동성은 흔적조차 없이 도시가 되어 요양(랴오양)시 박물관에 가야만 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백암성은 고구려인의 굳센 기상처럼 지금도 견고하고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요동성이 수·당의 고구려 침략시 첫 공격대상지라면 백암성은 바로 그 후방을 지키는 방어선인 셈이다. 그러나 당태종이 645년 요동성을 함락시켰을 때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린 치욕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백암성은 당태종에 의해 함락된 후 암주성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연주성으로 불리고 있다.

단동(단둥)에서 택시를 대절해 6시간만에 도착한 백암성은 농가 140여호가 모여 있는 연주성대대마을의 뒤쪽에 있었다. 마을어귀에서 한담을 나누던 촌로들에게 성의 이름을 물으니 『고구려가 세운 연주성』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마을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연주성표지판이 나타나고 그 뒤로 밋밋한 경사지에 북쪽성벽이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져 있다. 성벽 양편으로는 목초지대가 펼쳐지고 군데군데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어 천수백년전 격전지였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태종이 서북쪽에서, 이세적은 서남쪽에서 공격하는데 당차에서 쏘아댄 돌과 화살이 성안에 비오듯 쏟아졌다」는 「구당서」의 기록처럼 고구려와 당이 만주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성벽을 따라 정상에 도달할 즈음 북서쪽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먹구름을 몰고 오며 굵은 빗줄기를 뿌려댄다. 그 비에 고구려가 젖고 있다. 울부짖는 바람소리와 빗줄기는 1,300여년전 요하(랴오허)를 건너 요동성을 짓밟은 후 밀어 닥치던 당태종의 수십만대군과 그들의 화살세례를 연상시킨다.

성벽은 대략 6∼8 높이에 2의 폭으로 축조됐으며 전체길이도 2.5에 이른다. 오랜 세월을 못이겨 군데군데 무너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형상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정방형의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축성방식이 고구려성임을 입증해준다. 정상에는 전투를 지휘하던 망루가 끝없이 펼쳐진 요동평원과 한반도로 이어진 주변 산줄기를 굽어 보며 우뚝 서 있고 그 아래편으로는 100이상의 수직절벽이 시퍼런 태자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고구려가 지배층의 분열과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집중공격으로 무너지기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인의 투혼과 사기는 중원을 통일했던 여러나라를 불안에 떨게 했다. 안시성에서 격전을 치르다 패했던 당나라장군 이세적은 오죽했으면 전투중에 『성을 취하면 남자는 남기지 않고 죽인다』며 이를 악물었을까.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날로 훼손되고 모습을 잃어가는 고구려의 성들을 찾아 본 이 여정은 민족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무너져 내린 성벽과 성을 쌓는데 사용된 돌조각 하나하나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고구려인들의 기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민족이든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을 경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워주려는듯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최진환기자>

◎고구려 유민들은 어디로/발해건국·신라에 투항 등 5갈래로 흩어져/주류는 보장왕과 중서 안동도호부 합류

고구려가 망한 뒤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주변국가에 뿔뿔이 흩어졌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인들은 ▲보장왕과 함께 중국의 포로 ▲발해 건국 ▲신라 투항 ▲일본, 돌궐로 피신 ▲고구려 옛땅 잔류등 5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류는 보장왕과 함께 중국 강회지역으로 포로로 끌려간 3만 8,000호의 유민들. 대부분 6년간 강제노역 끝에 요양(랴오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로 돌아와 잔류유민에 합류했다. 이들은 698년이후 고구려왕손들이 통치하는 반독립국 형태의 안동도독부의 주민으로 정착, 고구려인의 맥을 이어갔다.

고구려왕의 후손들에 대한 연구는 89년 흑룡강신문에 요양의 「고씨가보」에 관한 글이 실리면서 관심을 끌었다. 고구려 20대왕인 장수왕의 59대손이라고 주장하는 고지겸씨에 따르면 이 족보는 19세기말에 제작됐으며 가족계통도와 선조묘지지도, 선조의 이동상황, 세대별 항렬자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고지겸씨는 95년 2월 고구려연구소(소장 서길수 서경대교수)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 「고구려 장수왕후예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 메모 이원희씨

백암성답사는 당초 일정에 없었으나 웅장한 성벽과 빼어난 주변경치로 널리 알려진 곳이어서 나중에 포함시켰다. 길을 물어가며 어렵게 찾아갔지만 도착하자마자 많은 비가 내려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수 없었다. 특히 깎아지른듯이 솟아 있는 바위절벽쪽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다가가지 못해 안타까웠다. 북쪽 능선위에 쌓은 성벽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동안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고구려인의 피맺힌 고역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고 선조의 땀과 눈물이 스민 돌 하나하나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56년 경북 경산출생

▲계명대 회화과와 동대학원

▲개인전 9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