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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결의」로 포장한 강압조치/언론통폐합 어떻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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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결의」로 포장한 강압조치/언론통폐합 어떻게 했나

입력
1996.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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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비협조 서울경제신문등 44개 문닫아검찰이 수사에 착수함으로써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80년 언론통폐합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정통성없는 권력의 언론에 대한 폭거였다. 언론통폐합은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로 불리는 12·12와 5·18에서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내란 과정에서 저항세력이었던 언론의 체질을 순치시키기 위한 강압 조치였다.

언론통폐합은 80년11월 당시 전국 63개 언론사(신문28, 방송29, 통신6)가 신문사 11개(중앙지1, 경제지2, 지방지8) 방송사 27개(중앙3, 지방3, 문화방송계열21) 통신사6개등 전체 매체의 3분의 2가 넘는 44개를 통폐합한 조치이다.

종합일간지 신아일보, 당시 정상의 경제지였던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이 폐간됐다. 지방지는 시·도 1개사 원칙에 따라 부산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대구 영남일보가 매일신문에 흡수돼 대구매일신문으로, 전남매일과 전남일보가 광주일보로 개칭통합됐다. 방송은 3대 TV방송사의 하나였던 TBC가 완전히 KBS에 흡수됐고 라디오방송 동양라디오와 DBS도 KBS에 통합됐는가하면 CBS는 종교방송만 허용됐다. 동양 합동 두 통신사는 해체돼 신설 연합통신에 흡수됐고 지방기사는 통신을 통해서만 공급받는다는 형식아래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제도가 폐지됐다.

언론통폐합은 외견상 11월14일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스스로 언론의 구조와 문제점을 정면에서 투시하고 자기혁신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맞고 있다…』며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결의문발표 이틀전인 11월12일 13개 언론사의 사주들은 보안사 사무실로 불려가 강압적인 분위기 아래서 자신들이 소유한 언론사를 통폐합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각서내용은 보안사가 미리 작성한 것으로 언론사사주들은 보안사 담당관들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썼다. 『본인은 새 시대를 맞아 국가의 언론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신문을 다음과 같이 조치할 것을 다짐하여 각서하며…앞으로 민·형사소송등 여하한 방식에 의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쓴뒤 자필서명을 했다.

언론통폐합에 이어 그해 12월 입법회의에서는 언론기본법이 통과된다. 한국언론은 최대암흑기가 시작됐고 체제홍보라는 신조어가 5공을 지배했다.

언론통폐합은 그해 6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반대한 언론인 구속, 8월 언론인 7백11명 대량해직등 신군부의 언론 길들이기 시나리오에 따라 이미 시작되었음이 88년 국회의 언론청문회에서 밝혀졌다.

6·29선언에 힘입어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88년 6공이 출범하자 통폐합된 언론사들의 국가배상 지급신청과 반환소송등이 줄을 이었고 당시 신군부측에 협력했던 언론계 내부사정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진실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채 언론통폐합의 악몽은 여전히 언론계를 짓누르고 있다.<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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