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백설위에 힘찬 첫 발자국/12월7일 상오6시 짙은 안개 눈보라 헤치며 전진백색의 제7대륙, 남극.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진 빙원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강풍. 밤과 낮의 구분도, 하늘과 땅의 경계도 없는 망망설해의 대륙. 멀리 시야가 멈추는 설평선에서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억겁의 세월이 얼어붙은 청빙이 맞닿아 있다.
남극 대륙은 지구인의 발길을 거부하는 지구의 끝이다. 남극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 푼타 아레나스에 가려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거쳐야 하고 우리나라에서 산티아고행 비행기를 타려면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야 한다.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북미대륙에서 남미대륙으로, 그렇게 지구를 반바퀴 이상 돌아야 남극 대륙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허영호씨가 남극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93년11월. 남극점 도보횡단에 도전하면서였다. 그는 빈슨 매시프 등정을 위해 2년만에 남극 대륙을 다시 찾았다. 남극 대륙 전진기지인 패트리어트 힐로 향하는 허큘리스 비행기에서 그는 이렇게 일기장에 적고 있다.
『비행기는 계속 구름 위로 날아간다. 모두들 잠에 떨어졌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혹시나 남극이 보일까해서 몇번이고 조종석에 올라갔다. 푸른 바다에 가끔씩 떠있는 얼음덩어리…. 6시간의 비행끝에 비행기는 착륙한다. 얼음판에 몇번 퉁퉁 튀긴다. 파란색의 얼음판. 패트리어트 힐이다. 2년전에 왔던 곳. 그러나 마치 엊그제 다녀간 것 같다』
원정대 일행이 패트리어트 힐에 도착한 것은 12월6일(이하 현지시간) 상오 8시. 원정대는 이곳에서 2년전 만년설속에 묻어두었던 식량을 찾아 밤 9시 브란스콤 글라시어로 향했다. 브란스콤 글라시어는 빈슨 매시프의 남쪽 루트가 시작되는 해발 2,100m지점. 패트리어트 힐을 출발한 지 한 시간만에 브란스콤 글라시어에 도착한 원정대는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했다. 본격적인 빈슨 매시프 등반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을 출발한게 12월2일 상오 7시30분이었으니까 베이스 캠프까지 오는데만 110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지금 남극 대륙은 해가 지지않는 백야. 따로 밤이 없다.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빈슨 매시프를 만났다. 바다 위에 떠있는 백색의 섬들처럼 엘즈워스 산맥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만년설과 빙하와 구름위로 솟아있다. 그중에 가장 멀리, 또 가장 높이 솟아있는 봉우리가 바로 빈슨 매시프일 것이다. 깎아지른듯한 설벽, 선명하게 드러나있는 눈처마, 그리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를 숨겨놓고 있을 빈슨 매시프. 2년전 남극점 도보횡단후 도전하려 했지만 그때는 기상악화로 베이스 캠프도 설치 못한채 돌아서야 했었다.
2년전 남극원정 때 사용했던 텐트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어느쪽에서 바람이 불어도 견딜 수 있도록 6각형으로 제작된 이 텐트는 바깥의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내피와 외피 사이에 5㎝의 공기층이 있다. 또 텐트 바닥에는 얼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을 수 있도록 11㎜두께의 특수 매트리스를 깐다.
12월7일 상오 6시. 바깥은 짙은 안개가 끼어있어 시야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스 캠프를 출발했다. 3대 극점 7대륙 최고봉 등정의 마지막 목표를 향한 힘찬 첫걸음이 설원에 찍혔다.
◎빈슨 매시프 어떤 산인가/크레바스로 접근 불능 57년에야 발견
만년설의 땅, 남극 대륙 북서쪽에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엘즈워스 산맥. 1935년 엘즈워스 산맥을 처음으로 발견한 미국의 링컨 엘즈워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웅자한 산봉우리들이 눈 앞에 나타났다. 4,000m가 넘는 봉우리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는지도 모른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나 엘즈워스도 산맥 서측 끝부분에 솟아 올라있는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사방이 거대한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로 둘러싸여 육로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빈슨 매시프가 인간의 눈에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57년. 미국의 남극 항공탐사대에 의해서였다.
미해군 비행기 기상에서 이 봉우리를 최초로 발견한 칼 빈슨의 이름을 따 명명된 빈슨 매시프는 1966년 미국 알파인 클럽과 국립과학재단 등정팀에 의해 초등됐다. 1985년에는 한국해양소년단 소속 등반대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했고 허영호씨가 두번째다.
빈슨 매시프는 해발 5,140m. 히말라야의 자이언트봉들에 비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블리자드로 불리는 남극대륙 특유의 폭풍설과 한번 발을 헛디디면 수천m의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되는 크레바스 지대가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연중 최저기온이 영하 80도 아래까지 떨어져 남극의 여름철인 10∼2월 사이에만 등반이 가능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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