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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사진 두장(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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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사진 두장(장명수 칼럼)

입력
1995.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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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86·부산 청십자 병원 명예원장)가 25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결국 부인을 못 만나고 가셨구나』라는 아픔이 가슴을 찔렀다. 북에 있는 아내와 다섯 자녀를 그리며 그들과 만날 날을 45년이나 기다렸던 그는 크리스마스 새벽 영혼으로 삼팔선을 넘어 아내에게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한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며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박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집 한칸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고, 통일을 기다리며 독신을 지켰던 남북 이산가족의 상징이었다. 1951년 잠시 피란했다가 가족과 헤어진 그는 가방하나 들고 출장떠나온 사람처럼 일에만 몰두하면서 아내에게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았다.

부산 고신의료원 옥상에 지어진 그의 거처에는 아내의 사진 두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장은 30대 중반의 젊은 아내, 또 한장은 80대의 늙은 아내였다. 91년 미국에 사는 그의 조카가 북한에 가서 그의 가족을 만났고, 아내의 편지와 사진을 들고 왔는데, 그는 『혼자몸으로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몰라보게 늙은 아내의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아내와 5남매가 살아 있음을 알게된 그는 남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빌었고, 회담이 깨질 때면 낙담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그는 「멀리 있어도 항상 같이 있는 아내」를 간직하게 된 것같았다. 몇년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도 나도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또 이제와서 만나고 못 만나고가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참사랑을 해왔고, 그 사랑은 저세상에서도 영원하리라고 믿습니다』

장기려박사가 아내를 만날 날을 그 자신보다 더 조바심치며 기다린 사람은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십년간 떨어져 있으면서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해온 그들 부부가 살아서 만나는 것을 보고 싶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지구상에 그들의 상봉을 막는 나라가 있다는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동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산가족을 상징하는 푸른 십자가이기도 했던 그는 끝내 살아서 아내를 못만난채 눈을 감았다. 우리는 새삼 북한에 대해 솟구치는 분노를 느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산가족이 상봉의 한을 못이룬채 눈을 감을 것인가. 북한은 언제까지 문을 닫고 억지를 쓸 것인가. 장기려박사의 죽음은 이산가족 문제를 더 늦춰서는 안된다는 애타는 절규이고, 무서운 경고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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