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적 시어에 담은 민족고유의 정서 송선희의 시집 「횃불 밝혀 비추이다」(햇별출판사간)는 그가 쓴 다른 세 권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이라는 한 마디의 비평밖에는 얻어낼 것이 없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모두 구한말의 어느 순간에 내방의 한 규수에 의해 씌어져 갑자기 시간을 몰아잡고 우리 시대로 날아온 시집처럼 보인다.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이야기한다면, 이인직이 그의 신소설을 쓸 무렵 일본이나 서구의 영향이 완벽하게 중단되었더라면 우리의 시가 오랫동안 지니게 되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주제와 표현법들을 이 시집들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기서 자연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잔칫집의 병풍이나 시골 새색시 방의 횃댓보에서, 또는 잘 그려진 이발소그림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그 자연의 요소들은 저마다 정이건 한이건 원이건간에 우리의 「민족정서」를 하나씩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순박한 촌부가 아니다. 그는 이른바 미국박사이며, 한국의 혈족과 종족의 관계에 대해 뛰어난 논문을 쓴 인류학자이다. 실제로 그는 첫 시집의 머리에 「한 문화인류학도로서 민족의 문화적 기풍에 내재한 고유의 정서를 시로 읊고자」 시도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의 시는 「문화전통의 한 단면」을 부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 바람 크게 불어 푸른 잎이 흩어지고 두 번 바람 세게 불어 잔 가지가 다 꺾이」는 계절의 「풍죽도」를 그리거나 한 포기 풀의 「허약한 생명」에서 「귀향과 귀토의 가쁜 숨을」 발견할 때, 또는 「먼동의 동창에 비추인 저 차디찬 서릿발」에 외롭게 늙는 한 청상의 한숨을 부치거나 「한바탕 강심을 누벼 노닐던 한 세월이 유수이려니 서산머리에 뉘엿한 햇살에 문득 뱃머리를」 돌리며 무상한 세월을 애달파할 때, 언제나 거기 드러나는 것은 시인 그 자신의 식지 않는 열정과 깊어지는 비애이다. 게다가 이 감정에는 현실성이 부족하지 않다. 그에게서는 심산계수 녹야청산 추야월 설한풍같은 표현들이 상투어이기는커녕, 그것들이 처음 만들어지던 순간의 모든 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말과 말로 지시되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시가 태어난다고 혹자는 말한다. 송선희에게는 그 간극이 없다. 어떤 말이건 말 하나가 진실하게 사물 하나를 지시한다. 그러나 간극은 다른 곳에 있다. 말과 사물이 빈틈없이 맞아 떨어지는 그의 세계가, 말과 사물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가는 우리들의 세계와 맺는 관계를 통해, 그의 시가 시로 읽힌다. 궤변의 세계인 우리 세계를 배경으로 순박한 그의 세계가 빛난다.
송선희시는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겠지만, 그가 읊으려는 정서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가 잃어버린 낙원의 잔해이며 건설하게 될 낙원의 주춧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서들은 이렇듯 천진한 모습으로보다는 다양하게 변형된 형식으로 더 자주 나타날 것이며, 그래서 시의 덫이 되고 함정이 될 것이다.<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교수>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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