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2년을 살아온 북한은 철저한 출신성분위주의 계급사회다.이러한 북한사회는 양반과 상놈의 관계가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제도화해 있다. 환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북한에서 동의학(한의학)을 전공하고 함흥 사로구역 종합진료소와 함흥제약공장에서 동의사로 일하다가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나갔다. 의사가 벌목공이 됐다는 것을 남한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특별한 성분이나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해외에서 돈을 버는 길은 벌목공이 되는 길 뿐이다. 따라서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이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3년동안 「돈투사」가 되는 일이 흔하다.
벌목장을 탈출, 2년동안 중앙아시아지역을 전전하다 귀순한 나는 우선 서울경동시장부터 찾았다. 개인 한약방과 의원이 즐비한 이곳에는 이름 가진 한약이 없는 것이 없었다. 50년동안 남북이 갈라져 판이한 정치제도 밑에서 살고 있지만 역시 동양의학 최고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집필하신 의거장 허준선생을 조상으로 모신 같은 민족이구나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당 간부들만이 보약으로 쓰는 인삼 녹용 영지버섯등 「희귀한」보약재가 가는 곳마다 쌓여있는데는 질리도록 놀라고 말았다. 또 이 약재들을 쓰는 방법이 남북간 사정에 따라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인삼을 누구나 사먹을 수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경동시장에서 인삼 500g의 값을 물었다. 나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던 주인은 『한근에 2만8,000원이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약을 처방할 때 g단위로 표시하는 북한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옛날 그대로 근·량·돈·푼으로 부르고 있었다. 인삼 한근을 사 집으로 돌아오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한의사이면서도 학교에서나 종합진료소에서도 저렇게 많은 인삼을 보지 못했다. 고급간부들이 마시는 인삼술병 속에 들어있는 3∼4년생 인삼을 몇뿌리 보았을 뿐이다.
북한사람들은 일생에 한두번 결혼식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인삼술을 마신 뒤 모양을 내려고 넣어둔 인삼을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먹는다. 술병속에 있던 3∼4년생 인삼뿌리를 먹은들 무슨 약효가 있으랴만 저마다 먼저 먹으려고 술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서 인삼은 모두 인삼술에 넣어 먹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함경남도 의약품공급소에서는 중앙으로부터 얼마간의 인삼을 공급받아 병원들에 보내는데 이를 독극마약보다 더 비밀리에 취급해 소장이나 취급자만이 그 수량을 알 수 있다. 병원에서는 일반환자들의 처방에 인삼이 들어있으면 만삼이나 황기로 대용한다. 인삼처방전을 내린 의사는 병원장에게 불려가 호된 욕을 먹는다.
인삼은 오직 진료과 대상환자들에게만 처방할 수 있다. 진료과 대상환자들이란 간부나 그집 식구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서울의 경동시장에 쌓여있는 저 인삼 녹용이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 처방대로 북한 일반주민들의 보약으로 쓰여지는 날이 오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곤 한다.
□약력
▲1961년 함남 함흥시 출생
▲1985년 함흥고등의학전문학교 동의과 졸업
▲1988년 함흥의학대학 동의특설학부 졸업
▲1988∼91년 함흥 사로구역 종합진료소 동의과 의사
▲1991∼92년 함흥제약공장 노동자
▲1992년 7∼12월 시베리아 북한임업대표부 제2연합11사업소 노동자
▲1994년 8월16일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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