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소련파 숙청앞장 체제수립 “공신”/국내외 주요쟁점때마다 해외 대변인역북한외교관의 출신성분이나 경력은 다양하다. 처음부터 전문외교관의 길을 걸어온 이들도 있지만 원로급중에는 군, 학계, 문화사업분야, 언론계 출신으로 발탁된 이들도 적지않다. 이들은 순수외교업무보다는 체제선전 대외비난등 정치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지난 7년째 중국대사로 나가있는 주창준(73)은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베이징(북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입장을 밝히는등 해외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북한핵사태때에는 『어떠한 제재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도전적인 발언을 했고,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연초에는 『북한의 대외정책은 북미관계 개선에 초점이 모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북한 노동당 서열 104위에 올라 있으며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우리에게 낯이 익게된 것은 72년 남북적십자회담때 부단장으로 서울을 다녀갔고, 85년 남북국회회담 1차 예비접촉때에도 북측 부단장으로 나왔었다.
1922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공산주의서클활동으로 체포된 적이 있다. 해방후 청진시 노동당 당원으로 첫 출발을 했고 56년 당 선전부 과장으로, 그리고 대외연락위원회 부위원장, 내각 출판총국장, 당선전선동부 부부장등을 거쳤다. 그동안 연안파 및 소련파 숙청과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수립에 기여했고, 이 공로로 59년4월부터 61년까지 군사정전위 북측수석대표(소장)로 발탁되었다.
63년에는 다시 버마주재 총영사로 나가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2년에는 적십자회 중앙위 서기장이 되었고 8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나갔다. 그후 노동신문사 주필로 체제언론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88년 9월 신인하(89년 사망)의 후임으로 주중대사에 임명돼 오늘에 이른다. 김일성과 오진우 사망때 장례위원에 올랐던 그는 요즈음에는 중국과의 우호친선협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민병용·본사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민병용·본사통일문제연구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