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녀산성/건국기틀 다진 고구려 최고성(한문화 원류기행:9)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녀산성/건국기틀 다진 고구려 최고성(한문화 원류기행:9)

입력
1995.12.15 00:00
0 0

◎주몽,첫 도읍 환인동북방에 축성/3면이 절벽·산정엔 평지 “철옹성”/왕도는 호반으로 변했어도 1만여조선족 긍지 드높아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런(환인)은 지안(집안)에서 북서쪽으로 100여 거리에 자리잡은 인구 30만의 호반도시로 변했다. 주몽(주몽)은 여기에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는 첫 성 오녀산성을 쌓았다. 오녀산성 역시 환도산성에 버금가는 천연의 요새. 험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환런은 넓은 평야와 수량이 풍부한 훈(혼)강을 품고 있어 왕도로서 합당한 지세를 지니고 있다. 환런은 졸본 또는 흘승골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일행이 졸본천에 이르러 바라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경치도 좋았으며 산과 강이 험했다. 마침내 도성으로 정했는데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가에 간단한 집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성을 고씨로 했다」고 씌어 있다.

주몽이 건국 3년뒤 축조한 오녀산성은 환런의 동북쪽으로 7쯤 떨어져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비류곡의 홀본 서쪽 산정상에 성을 짓고 도읍을 세웠다」고 명기된 곳이 바로 여기이다. 그런데 이 곳은 발해의 첫 수도 오동성과 함께 중국정부에 의해 외국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다.

환런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경로를 통해 산성답사 승인을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시당국의 감시만 받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족관리를 설득, 산성 아랫마을까지만 접근한다는 조건으로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작가 1명, 조선족관리등과 함께 지프를 빌려 타고 시가지와 들판을 가로지른 길을 따라 10여분쯤 달리니 깎아지른 듯한 웅장한 바위산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해발 820m의 오녀산, 그 험준한 산세를 활용해 성을 쌓은 것이다. 오녀산성의 동·남·북면은 높이 100m 이상의 절벽이 울타리를 이루고 서쪽에만 가파른 길이 나 있다. 산 정상에는 남북 1,000m, 동서 300m에 이르는 평지와 함께 「천지」라는 연못까지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다. 허공에 떠 있듯이 정상에 서 있는 TV송신탑이 험산의 기세에 눌려 더욱 가냘프게만 보인다. 산아래에서 정상까지 송신탑근무원의 생필품운반 간이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산성 아랫마을 유가구촌에서 동남쪽으로 1,000m쯤 떨어진 혼강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동부여군사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던 주몽이 거북과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설화를 간직한 강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엄리대수, 삼국사기에 개사수로 기록된 그 강의 물줄기도 환런댐이 가로막고 있다. 동행한 조선족관리는 『일제가 착공하고 구소련기술자의 손을 거쳐 70년대 중국인에 의해 완공된 댐은 환런의 명소』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댐공사는 강의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주변의 고구려 무덤들까지 수몰시켰다. 특히 화살촉 토기등 고구려유물이 다량 출토돼 옛 도읍지임을 증명해주었던 고력묘자촌도 사라졌다.

유람선선착장 직원은 『풍광이 좋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특히 호수로 변한 댐주위에서는 큰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고 자랑한다. 왕도를 수상유원지로 훼손한데다 주몽을 구해준 물고기까지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족관리는 『중국정부가 남북통일후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소요에 대비해 90년에 만주족자치현으로 만들었다』며 『그러나 이 곳에 사는 1만여명의 조선족이 고구려의 후예로서 갖는 민족의식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최진환 기자>

◎고구려 건국시기/남한선 BC37년,연변 북한학계선 BC2∼3세기 주장

고구려 건국시기에 대해 남한학계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으로 보고 있지만 옌볜(연변)과 북한학계에서는 서기전 2∼3세기라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강맹산 옌볜대교수는 고구려 건국전에 이미 고구려족이 존재했으며 주몽이 후에 이를 포함한 여러부족을 통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 「후한서」고구려전에 「서기전 2세기말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과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중이던 668년 당나라 장수 가언충이 쓴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 900년이 되었다」라는 기록등을 내세운다.

북한역사학자 이지린·강인숙은 공저 「고구려역사」에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기록을 인용해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안승에게 주는 책명문에서 「고구려가 거의 800년이나 유지해 오다가 망했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건국시기를 역산, 기원전 2세기로 보고 있다.

반면 일본학계와 남한의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 삼국의 국가형성기를 200∼300년 늦춰 잡는다. 삼국 건국관련 기록을 모두 신화로 보고 삼국의 성장이 뚜렷한 서기 3세기까지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국내 고교국사교과서에 신라는 서기전 5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으로 건국시기를 기술한 반면 고구는 「서력기원전후」라고 모호하게 표기하고 있다.

◎작가 메모/이남찬씨

유가구촌에서 새벽안개 사이로 올려다 본 오녀산성의 풍경은 성이 간직한 건국신화만큼이나 신비로웠다.

날카로운 칼날바위가 가지런히 들어선 산세, 산정상을 넘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구름, 산너머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햇살등은 아득한 2,000년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비경이었다.

동행한 조선족 안내인의 재촉에 스케치는 생각도 못하고 사진만 5∼6컷 찍은 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머지 않아 자유롭게 산정에 올라 캔버스를 펴고 마음껏 그릴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46년 충남 아산출생

▲서라벌대 회화과

▲개인전 2회

▲서울아카데미 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