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장대한 서사구조로 그린 정통 소설/탄력적문체 속도감있는 전개 “흡인력”/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예선에서 넘어온 작품은 여덟 편이며, 이 중에서 논의의 대상이 될만한 것은 다음 네 편이었다.
「그날, 막차는 오지 않았다」는 70년대에서 80년대라는 우리 최근세사 속에서 청춘기를 보낸 한 교사의 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소재상으로 볼 땐 우리의 많은 소설들이 아직도 소화해 내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그렇지만 작자는 이 소재를 다룸에 있어 너무 범속한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18세에서 33세까지의 세월 속엔 극적 변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음도 이 때문이 아닐까.
「풀의 꽃」. 소재상의 강점이 미덕으로 보였다. 미국서 교목생활을 하는 아들이 아비의 과거행적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는 소설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지만, 신사참배를 둘러싼 아비의 밀고사건등에 대한 심도있는 탐구가 미흡한 것으로 보였다. 종교적 주제인 경우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밤을 건너는 연가」. 3부작으로 된 정석에 속하는 구성법이 돋보였다. 일제 말기, 60년대, 80년대등에 걸쳐 대구 근처의 농촌을 배경으로 전개된 이 작품은 시대 속에 용해된 민중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어 그 나름의 안정감이 있다. 결말의 안이성이 흠이라고 보았다.
「흰 옷 이야기」. 동학혁명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까지에 이르는 우리 근대사 속에서 겪는 여인 3대의 이야기. 여인이되 막금이, 똥칠개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천민계층여인의 이야기이다.
남자도 아닌 여자로서의 종의 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근대화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작가의 의도이겠지만, 그러한 주제의식에 앞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강점을 갖고 있다. 문체가 지닌 탄력성이 그것. 대화일변도의 이 문체는 이야기의 속도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삽상한 느낌을 준다.
묘사로 말미암아 몸이 무거워져 답답하기 쉬운 많은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이야기」가 지닌 미덕을 잘 발휘하고 있다.
◎무거운 주제 쉽게 푼 역량 돋보여/박완서 소설가
매우 어렵게 당선작을 내게 되었다. 대작들이라 읽기도 힘이 들었지만 망설임 때문에 더 힘이 들었지 않았나 싶다. 예선에서 넘어온 여덟 편 중 내가 추려가지고 심사에 임한 작품은 「풀의 꽃」 「밤을 건너는 연가」 「흰 옷 이야기」 세 편이었다.
세 편을 염두에 두고 나가긴 했지만 강력하게 밀고 싶은 작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작품을 놓고 의견교환을 하는 사이에 놓치기 아깝다는데 일치를 본 작품이 생겼다.
그게 채길순의 「흰 옷 이야기」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 작품 중 완성도가 가장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1, 2, 3부로 구성된 3부작인데 3부의 엉성하고 조급한 처리는 소설 이하였고, 2부도 상황묘사나 심리묘사에 할애해야 할 지문을 극도로 줄이고 대사 위주로 줄거리를 이끌어 나가면서 만남과 헤어짐에 우연을 남발하다 보니 만화나 무협소설같은 느낌이 들었다. 트집 잡을 거 투성이건만 놓치기 아까웠던 것은 1부의 미덕 때문인데, 지문보다는 대사 위주의 작법이 2부나 3부에서처럼 거슬려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동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독자로 하여금 재미있게 빨려들게 하려는 작가적 역량으로 보였다. 여태껏 나온 동학을 다룬 소설은 민중이 공감하기엔 너무 지적 이념의 목소리가 높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엄숙주의와 중압감을 능청스럽게 극복하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구수한 입담과 충청지역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깊은 애정도 딴 동학관계 소설과의 다른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완성도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당선작을 결정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러나 별로 흠 잡을 데는 없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설을 또 한 편 보태느니, 남다른 가능성을 지닌 작가가 시간에 쫓겨 뒤로 갈수록 허술해지고만 작품을 밀어주자는데 결국은 동의하고 말았다. 연재로 독자와 만나게 된다니 허술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아서였다.
◎등장인물 부침 냉정하게 간추려/김원일 소설가
본심에 올라온 여덟 편중 네 편이 관심을 끌었다.
「그날, 막차는 오지 않았다」는 80년대의 숨가쁜 현실을 거쳐온 성장소설이다. 현실대응논리, 젊음의 방황·열정·소진과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결점은 너무 많이 다뤄 온, 그러나 조금도 발전되지 않은 상식을 반복하고 있는 점이다. 작가의 개성이 보이지 않았다.
「밤을 건너는 연가」는 해방공간의 격동기를 취급한 소설이었다. 곡진한 주변부 삶이 잘 드러나 있으나, 너무 난삽했다. 거친 문장과 등장인물의 안이한 처리가 결점을 보탰다. 읽다보면 그 시대가 눈에 잡히지만 독후감은 미로를 헤매다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풀의 꽃」은 일관된 목적의식이 분명한, 진지한 소설이었다. 한국 기독교통사의 주요 쟁점을 수렴하고 있었다. 선교사에 의한 복음전파, 친일배교문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갈등, 오늘의 기독교의 기복신앙관, 기독교의 사회참여등 고증과 조명에 설득력이 있었다. 인물의 성격 부각도 분명했다. 부담으로 남는 점은 문학적 감동의 창출이 약했다. 삶의 풋풋한 향기가 없는 메마른 작업에 대해 작가는 좀 더 고민했어야 했다.
「흰 옷 이야기」는 요즘 소설로는 색다른 취향의 역사물이라 우선 눈길을 끌었다. 능숙한 이야기솜씨꾼의 재주가 돋보였다. 80년대까지 풍미한 소설의 사회과학적 접근방법을 배제하고 등장인물의 파란만장한 부침을 냉정하게 간추린 능력은 인정되나, 그 속도감이 대화 위주의 재미에 치우쳐 위태롭기도 했다.
설화적 요소가 센 서장과 1부는 좋았다. 무언가 건져낸 것같은 기대감이 2부 일제시대로 넘어가자 리얼리티가 약해진다 싶더니, 3부에서는 너무 서둘러 요약에 그치고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으로 미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의 고충이 이런 점이라 싶었고, 나로서는 전반적인 가필과 3부의 개작을 충고하여 선에 올리는 쪽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채길순씨 당선 소감/이 땅의 어머니를 위하여/“동학현장 떠돌기 10여년 조상의 아득한 숨결 느껴/기왕 이야기꾼 됐으니 「어머니들 한」 길어 올려 보자”
20여년전 소설을 쓰겠다고 궁상을 떨던 문학소년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막연히 소설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았지만 차츰 고통스러운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을 내려 놓기에는 너무 벅찬 짐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숙명의 굴레같은 것이 되어버렸는데, 굴레로부터의 해방은 오직 소설을 붙들고 씨름하는 길 뿐이었다. 그중 동학의 현장을 위해 떠돌아 다닌지 10여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 조상의 아득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이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의로 남는가를 고찰하게 되었다. 즉 역사란 항상 오늘의 시각에서 새롭게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파악한 역사는 상당히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여기서 추상적이란 말은 소설적 흥미를 지닐 수 있는 큰 줄기를 말한다. 이런 경우 소설이 가볍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소설의 추상성으로도 역사의 진실성이나 교훈을 충분히 형상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학을 위해 10여년을 쫓아다녔고 이를 소설화했지만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물론 소설적 재주가 무딘 탓이랄 수도 있겠지만, 요즘 독자들은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역사의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책을 보아야 한다는 게 새로 터득한 지론이다. 요는 소설 속에서의 역사는 늘 오늘이나 미래의 풍요로운 정서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느새 내 머리는 허옇게 센 늙은이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늙은 이야기꾼으로 남아야 하는 걸까.
기왕 이야기꾼이 되었으니 이 땅을 모진 바람 속에 살다가 떠난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자. 달빛에 젖어 지아비를 찾아 바람 부는 길을 나서는 지어미의 슬픈 옷자락이거나, 한숨으로 돌아와 자식을 부둥켜 안고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어머니를 찾아나설 참이다. 이 땅의 어머니는 늘 어떤 가슴으로 울었는가. 그리고 어떤 가슴으로 내일을 꿈꾸었는가. 우리의 어머니는 밤마다 한을 길어 올리며 신선한 아침을 꿈꾸었다. 그때까지 나는 기나긴 잠을 설쳐야 한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형님에게 소설을 그만 쓰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뜻밖에 건져올린 은빛 물고기를 건사하기에는 너무 벅찬 듯 하다. 이제 시집온지 열다섯 해 만에 아내에게 큰 상을 안겨주게 되어 기쁘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작가 약력◁
▲55년 충북 영동출생
▲75년 대전상고 졸업
▲83년 청주대 국문과졸
▲91년 청주대 대학원졸
▲현 청주세광고 교사
▲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중편 「사금골이야기」 연재
▲89년 장편 「동트는 산맥」
▲94년 역사기행 「동학의 현장」
▲「소설 동학」 1∼5권(91년), 「어둠의 세월」상·하(93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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