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수사 및 사법처리가 끝났던 율곡사업비리가 재수사되고 있다. 차세대전투기 선택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이종구씨 관련계좌에서 37억원의 입출금이 확인되었다고 한다.그리고 굴업도에 대한 핵폐기장 건설계획도 활성단층을 이유로 백지화된바 있었다.
이처럼 중요국책사업들이 그 전문성·복잡성·보안성으로 인해 국민들의 충분한 이해와 감시가 생략된채 처리됨으로써 온갖 전횡과 비리 및 시행착오의 온상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고속철도 건설, 신공항 건설, 각종 군사시설 건설등 각각 수백억원에서 수십조원에 이르는 역사적 규모의 사업들이 탈법적 로비와 뇌물수수로 잘못 진행되었을 개연성에 대해 담세자인 국민들은 새삼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정치가 무력화되는 여러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는 행정부의 추진업무들이 갈수록 과학적 복잡성과 기술적 정교성을 요하는데 있다. 산업·무역정책, 경기관리, 국방현대화, 사회간접자본 건설, 의약품·식품관리 등 대부분의 행정업무가 고도의 전문가적 분석과 판단을 요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춘 행정관료를 양성하거나 전문연구자들을 정책과정에 동원하고 있다.
이처럼 국정의 전문기술인력에 대한 의존이 늘어나는 것은 한편으로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입안·시행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행정관료들 사이에 기술적 판단 만능주의가 팽배해 시민들과 의회가 사안을 검토하고 비판할 정당한 절차가 급격히 축소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른바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의 득세라고 규정짓고 이에 따른 국정사안들의 탈정치화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아직 상당수 행정관료들의 비전문성이 개탄되는 한국사회의 고민은 단순히 기술관료주의의 득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행정이 정치지도자 개인의 권력과 이해관계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을 일부 파렴치한 정치인 및 경제인들이 악용하는 과정에서 기술관료주의가 교묘히 동원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기술관료주의의 팽배가 과학적·효율적 행정을 위해 불가피한 추세일지라도 우리의 특수한 정치·경제적 환경에서 초래할 수 있는 엄청난 부작용들에 대해 심각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기술관료주의가 시민과 의회의 정당한 국정 감시와 비판, 즉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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