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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패러다임」을 위하여(광복50/다시 여는 반세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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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패러다임」을 위하여(광복50/다시 여는 반세기:22)

입력
1995.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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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연구 한국적 분석틀을 만들자/율곡·퇴계의 유학 실학학풍 근대화과정서 외면/실정 안맞는 서구이론좇기 급급 학문발전 저해/보편­특수 변증법적 통합통해 새 방법론 모색을『학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학문을 새롭게 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시 제기된다. 우리는 지금 학문의 의존에서 자립으로, 수입에서 생산으로 방향을 바꾸어, 당장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세계 학문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필요한 비약을 하기 위해서, 「우리 학문의 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93년 출간된 조동일(서울대 국문학)교수의 「우리 학문의 길」(지식산업사간) 서문중 일부이다.

조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 학문의 현실을 「사료고증에 불과한 국학과 외국이론 수입에 급급한 양학」으로 진단 했다. 그는 『대학이 외국이론의 수입상으로 전락해서는 자기 문화의 잠재능력을 찾아내 이론화할 수 없으며 국제화시대에 학문의 종속화·예속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지적은 광복 50주년을 보내는 학계에 여전히 큰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 학계는 60년대의 구조기능주의로부터 70년대의 종속이론, 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유행을 좇기에 급급했다. 정작 학문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정립은 요원하다.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학문적 거울」인 「한국적 패러다임」의 부재는 우리 학계의 아킬레스건이다. 예를 들어 한국적 정치상황에서 의회나 계급보다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지역감정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한 정치학자는 아직 없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인 「패러다임(Paradigm)」의 사전적 정의는 「동질적인 성격의 연구자집단이 인정하는 합리적이고 독자적 원리를 지닌 이론의 체계」. 흔히 거론되는 「미국적 패러다임」은 「실증적인 조사방법을 중시하는 미국의 사회과학적 논리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적 패러다임」이란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분석할 수 있는 학문적 도구를 말한다.

우리 학문사에 한국적 패러다임은 전혀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 등은 유학을 한국적 시각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했으며 실사구시에 입각한 실학파의 학풍 역시 한국적 패러다임의 전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동일교수는 『우리의 학문전통은 원효 이규보 이황 서경덕 최한기 등에서 보듯이 이미 세계적 일반이론으로서의 독자성, 창의성을 이룬 예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한국적 패러다임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조혜정(연세대 사회학)교수는 92년에 낸 저서 「탈식민지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 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서구식의 근대화를 숨가쁘게 추진해야만 했던 우리 사회는 그동안 자기성찰에 있어서도 「서구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광복이후 계속된 비민주적 정치상황도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가로막았다. 조교수는 『스승없이 보편적 법칙에 매달린채 내 삶을 나의 언어로 이론화하지 못하는 나는 식민지지식인』이라고 고백하고 누구의 아무개 해석은 틀렸느니 하면서 주석싸움에 매달리는 한국적 학문풍토를 비판했다.

그러나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교수는 『한국적 패러다임과 서구적 패러다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학문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한 새로운 방법론적 전망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병국(고려대 정치학)교수는 한국적 패러다임을 되찾기 위한 시도에 대해 『조선시대의 정치사를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분석하는등 사회과학이라는 보편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학자 개인적인 노력보다 집단적 연구활동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박천호 기자>

◎「한국적 패러다임」의 시도/신용하·한완상·강만길씨 등 「전통­진보틀」 대표적/90년대 조동일 교수 논의 촉발… 「W이론」도 눈길

한국적 패러다임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모색돼왔다. 역사사회학의 신용하(서울대 사회학), 민중사회학의 한완상 전서울대교수, 분단사회학의 이효재 전이화여대교수, 분단사학의 강만길(고려대 사학), 경제사학의 김용섭 연세대교수, 그리고 「현상과 인식」의 동인인 박영신(연세대 사회학) 진덕규(이화여대 정치학)교수등이 대표적 학자들로 꼽힌다. 이들의 시도는 전통과 진보라는 두 흐름을 엮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 지배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순수학술분야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서울대 공대 이면우교수는 92년 경제패권시대에 한국 토양에 맞는 정서와 문화를 활용하는 한국적 전략인 W이론을 제창해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거대자본과 인력이 투여되는 미국의 첨단기술 개발(X이론)과 이를 응용하는 일본의 하이테크 상품개발(Y이론)방식에 한국 특유의 창의력과 신바람문화를 접목해 소비자의 잠재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키는 이른바 하이터치 제품 개발(W이론)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0년대 김용옥 전고려대교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등에서 외국학설만 내세우는 병폐를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성토한 바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90년대 들어 조동일교수에 의해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 패러다임을 논의할 때 사회과학에서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빠지지 않는다. 강만길교수는 70년대후반 사론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등을 통해 「분단시대」라는 학술용어를 정착시켰다. 그는 분단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여 대결하고 객관화, 비판함으로써 분단극복을 위한 사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효재교수도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 「분단시대의 사회학」 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이 인간해방운동이라는 기존 인식과 함께 한국 가족제도의 모순이 분단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남북대치상황이 사회전체 의식을 보수화시킴으로써 인습적 가부장제의 성윤리의식과 가정의 불평등구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다.<김병찬 기자>

◎전문가 진단/박영신 연대국학연원장·사회학과교수/패러다임의 무비판 수입자세 청산/우리의 역사체험서 인식틀 일굴때

무릇 모든 학문행위는 「처녀탄생」일 수 없다. 연구의 관심과 문제제기, 바로 거기에 이미 은밀하게 씨앗이 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도 그러하다. 권력과 재력에 뒤따라, 이념의 지배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훈련배경과 인맥에 따라 학문이라는 것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던 것이다.

우리 학문의 경우 그 인식의 틀은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일구어낸 것이 아니다. 외국으로부터 마구 빌려온 것이다. 지난 한 세기가 그러하였고 광복이후 반세기가 또 그러하였다. 앞서 인식의 틀을 도쿄에서 옮겨왔는가 하면, 뒤이어 뉴욕, 프랑크푸르트, 파리에서 수입하였다.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한 대항패러다임조차도 우리의 지적 산물이 아니라 수입품이었다.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 갈등론의 수입, 종속론, 관료적 권위주의론을 내세우고 또 그것을 비판하였던 수많은 글들의 출처를 보고, 알튀세르와 하버마스, 푸코를 되뇌는 그 요란한 소리의 진원지를 생각해보라. 마르크스주의와 그 비판을 둘러싸고 수다스럽게 법석을 떠는 행각을 보라. 모두가 예외없이 어느 외국 것에 선을 대고 있다. 그 어느 하나도 우리 나름으로 천착한 바가 없다. 그 어느 하나도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지적 고뇌에서 비롯되어 나오지 않았다. 문제의식조차 우리의 현실에서 빚어져나온 것이 아니다.

모두가 바깥세계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흉내내었던 것이며, 그것이 마치 학문의 첨단을 걷는 것인양 행세하고 있다. 이 뒤틀린 지적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의하지 않는 이 「회의없는 유쾌함」이 우리의 지적 마당에 넘쳐 있다. 이것은 지난 20여년동안 내가 산 지적 삶에서 느낀 경험이기도 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외국의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바깥이론을 배제하고 거부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비판적 반추없는 예속적 복사와 수입행위는 거부하되 주체적 대화의 행위는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 이같은 이론적 대화의 바퀴를 돌리는 한편,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경험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라는 다른 또 하나의 바퀴를 돌려야 한다. 이 두 바퀴를 돌리면서 우리다운 인식틀을 향하여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학문행위 일체에 대한 회의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서양의 지적 관심과 문제의식에 터하여 서양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세계를 재단하며 인식하고자 한 지난 날의 학문행위를 집합적으로 되새김질해야 한다. 서양의 인식관심과 이론에 봉사해온 우리의 학문 자체에 대한 일대 각성이 있어야 한다.

서양이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경험내용을 깊은 수준에서 살펴 거기에서 솟구쳐 나온 인식의 관심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규정하고 해명해야 한다. 서양의 인식틀에서 전혀 문제지평에 떠오르지 않았던 우리의 현실문제, 문화적 전통이 구조화하여 오늘에 이른 환희와 절망의 역사적 경험,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삶의 이야기, 그러한 것들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인식틀을 일궈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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