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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균감독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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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균감독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영화평)

입력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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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남성이 떠나는 「과거」 시간여행/한국적 「기억」 유럽 모더니스트 틀에 맞춘듯제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개막작품인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은 완성됐으나 일반에 개봉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는 「은둔자」인 감독의 명성과 단 1회 상영이란 이유로 많은 관객이 몰렸다.

이 영화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이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달마가…」는 불교적 조형미가 새겨진 한국의 풍경 속에서 불교적 소재를 새롭게 소개했다. 「달마가…」는 「마음의 고향」(1949년)이후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만다라」 「화엄경」 등 불교영화와 맥을 같이 했다.

새 영화 「검으나…」는 해천이라는 소읍에 도착한 알렉스 코프만이라는 외국이름을 가진 한국 중년남성이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다룬다. 탱크가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고, 총을 든 군인들이 주민들을 감시하는 수상한 기류가 떠도는 해천에서 알렉스는 자신의 고향이라고 짐작되는 감나무가 정겹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우물가 마을을 찾는다.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리듯 그는 기억의 두레박을 퍼올리지만, 이미 근대화가 진행된 해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대한 공장단지 뿐이다. 그는 점점 더 미로로 빠져들듯 해천을 헤매게 된다.

영화의 장면장면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유년기를 보낸 관객들에겐 일종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전쟁 후, 고통스러운 현재를 위무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란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우물가에 모인 어머니와 동네사람들의 정겨운 한때이다.

하지만 알렉스가 한국어의 언어질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전후 몰아닥친 근대화의 강풍은 공동체적 질서를 잃게 만들었고, 따라서 기억의 고향도 사라져 갔다. 영화는 이 사라진 것을 마지막 한장의 흑백사진으로 재현한다.

한국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사용한다는 특정성이 있을 뿐, 그 영화의 시각은 유럽의 모더니스트 영화들이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거듭거듭 강조하던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낡은 패러다임에 해방 이후 우리의 기억을 밀어넣은 셈. 관객들이 안토니오니와 타르코프스키영화의 모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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