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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구의 유작시들/어둠 감싸안은 정결한 영혼의 기록(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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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구의 유작시들/어둠 감싸안은 정결한 영혼의 기록(시평)

입력
199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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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반시」 겨울호는 지난 9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타계한 여종구의 시 열한 편을 싣고 있다. 그 시어는 순탄하고 그 주제는 진지하여, 순결한 낭만주의 안에서 마감한 생애라든지 문학의 제단에 바친 정결한 영혼등의 낡은 표현들을 이 시인에게 적용할 때는 그 상투성을 결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같다.「우리의 삶이 아름답지 못할 때 시는 아름다워도 좋은가」라는 의문문을 제목으로 삼는 시는 일종의 자화상이며, 따라서 시인론이다. 시인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 더욱 밝아지는 양심의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거기서 「가슴에 칼을」 꽂고 「피 흘리는 아버지」가 걸어 나온다. 시인은 도망가며 아버지에게 「제발 그만 소리없이」 죽기를 애원하나, 그 관뚜껑을 닫을 길이 없다. 이 우의적인 이야기는 시인이 자신의 역사적 동일성을 쉽게 확인할 수 없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역사 속에서 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 때, 산 사람의 자리도 그만큼 위태로울 것이 당연하다. 역사를 역사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은 현실의 추악함일 터이나, 시인은 도리어 거꾸로 된 의문문으로 시를 끝낸다. 「시가 아름답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정녕 아름다워도 좋은가」. 이 아름답지 못한 시는 물론 현실을 위한 희생이며, 삶이 저지른 죄의 대속이다.

현실의 어둠에 자기 자리를 정한 시는 그 어둠과 마음의 깊이로서의 어둠 사이에 하나의 통로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시 「두레박같은 가슴을 타고」는 바로 그 방법으로 한 여자의 마음인 땅 속으로 내려간다. 시인은 마른 우물 바닥을 다시 파헤쳐 들어가, 지하를 흐르는 여러 갈래의 강을 만나지만, 그가 「두레박으로만」 남아 있기에 「그녀는 언제까지나 지하로만」 흐른다. 목마름을 싣고 흐르는 이 강물은 죄의 욕망이 되기도 할 것이고, 그 구제의 잠재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두레박이라는 이름의 이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시적인 이성은 강물을 다 길을 수도 없고, 갈증을 다 감당할 수도 없지만, 어둠 속에 강이 있다는 것은 안다.

이 어둠이 시인에게 역사를 믿게 한다. 다른 시 「숲 속의 방」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한 방은 「넉넉한 젖가슴을 내밀고 동해로 서해로」 강을 내는 여성성의 방이며, 또 한 방은 애인과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기억의 방이다. 마지막 방이 이 두 방을 아우른다. 「아우내장터에서 수유리 금남로에서 애타게 부르던 노래가락」의 숲 속에 시인을 세워 놓은 역사의 방이다. 이 모든 방의 구성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일 것이다.

순결한 어둠이 죄의 어둠을 감싸 안는 곳에서 이제 시인은 또 하나의 어둠을 만났다. 「무덤 뒤의 광휘」라는 낡은 수사가 빈 말이 아니라고 믿는 감수성에게라면, 그의 죽음이 슬플 수만은 없다.<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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