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후 하나회주도… 정치군인 길로/10·26틈타 쿠데타 7년통치/정권이양 불구 백담사 유배/합천 보통집안 6남매중 넷째… 51년 첫 정규육사에14∼15년전 전두환씨가 11대, 12대 대통령에 취임할때 신군부세력은 그를 「민주형 새지도자」라며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그의 자서전까지 만들어져 각급 학교에서 강매되다시피 했다.
황강은 경남 합천 그의 생가 부근을 흐르는 강이다. 그가 이곳에서 태어나 청와대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기까지 5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3일 아침 그가 이곳에서 안양교도소까지 압송되는데는 정확히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몰락과 심판의 길은 그만큼 빠른 것이다.
그는 1931년1월23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4에서 지금은 모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 전상우씨와 어머니 김점문씨 사이의 6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집안형편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열두살때 대구로 나와 51년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그해 육군사관학교가 정규 4년제로 바뀌자 그는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씨등과 함께 육사11기생으로 입학, 화려하고도 굴곡많은 인생유전의 첫발을 내디뎠다.
생도때나 초급장교시절 그는 비교적 모범적인 군인이었다는게 일반적인 평이다. 하지만 60년 5·16 당시 대위였던 그는 후배 육사생들을 설득, 박정희의 쿠데타 지지대열에 나서도록 선동했다. 이때부터 그는 잘못된 망상에 빠진채 이른바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결성,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5·16 직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민원비서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그후 제1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등 군의 요직을 두루거쳤다.
고교때부터 친구이자 79년 12·12의 쿠데타동지인 노씨는 항상 그로부터 자리를 물려받는 후임자였다. 예컨대 두 사람은 70년말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대령), 78년1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80년 국군보안사령관, 87년 민정당총재직, 그리고 88년2월25일 대통령직을 각각 인수인계했다.
야심찬 정치군인에게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왔다. 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시해사건이 그것.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그는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김재규씨를 조사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혼란을 틈타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과 함께 12·12군사반란을 주도하고 이듬해 5·17 비상계엄확대등을 통해 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81년3월3일에는 12대대통령에 정식 취임한뒤 7년동안 극심한 학생시위와 재야인사들의 민주화투쟁을 철권통치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청와대를 지켰다.
그러나 임기 말년이 되면서 그도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87년 4월13일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 야권과 재야·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촉발시켰으며 끝내 「6·10항쟁」을 낳고 결국 「6·29선언」을 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거자금을 물쓰듯 퍼부은 87년 대선에서 노씨가 승리,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고 주장하던 것도 잠시, 88년 여소야대 정국하에서 그는 5공비리의 업보를 떠안고 11월 부인 이순자씨와 백담사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89년 12월31일 그는 정치적 5공청산의 매듭수순으로 전직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 5공비리·광주특위 연석회의 증인으로 나섰고 1년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이로써 자신이 치러야할 대가를 모두 치렀다는 태도를 보이며 측근들을 대동한채 자주 골프회동을 갖는등 여유를 보여왔었다.<홍윤오 기자>홍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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