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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때 피해­가해자로“악연”/김대통령­전씨 만남 15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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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때 피해­가해자로“악연”/김대통령­전씨 만남 15년 세월

입력
1995.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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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80년 강제로 「3김」 정계축출/YS,단식·민추협 결성 저항 계속/3당 합당·대선때 「일시적 화해」도김영삼 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의 「15년 인연」은 결국 돌이킬수 없는 악연으로 끝을 맺었다. 두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80년 5·17당시 전씨는 가해자였고 신민당총재였던 김대통령은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권부의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곧바로 집권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3김씨의 정치권 축출을 시도했다. 이때 김대통령은 상도동자택에 연금됐고 전씨의 대통령취임 직전인 80년 8월13일에는 강제로 정계은퇴선언을 발표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 근본적인 「정당성」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입장이 역전돼 김대통령이 전씨를 향해 오랏줄을 던지고 전씨는 하루아침에 미결수로 전락한 현실은 정치의 변화무쌍함과 권력무상을 실감케한다.

양자의 대립은 83년 5월 김대통령이 광주사태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생명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본격화했다. 이어 김대통령은 84년 8월 민추협을 결성, 다음해 2·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 돌풍을 이끌어냈고 그 여세를 몰아 직선제 개헌투쟁에 나섰다. 전씨는 한때 내각제개헌안을 내놓고 김대통령의 협조의사를 타진했으나 김대통령은 이를 거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음으로써 정국은 더욱 경색됐고 두사람은 정면대결의 외길로 치달았다.

김대통령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6공정권 출범후에도 전씨에 대해 계속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13대 국회초반 여소야대정국에서 김대통령이 이끈 통일민주당은 5공비리청산에 대해 다른 야당에 비해 가장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결국 전씨는 88년 11월 야권의 파상공세에 굴복, 백담사로 사실상의 유배를 떠나 일단 정치권의 전면에서 퇴장했다. 8년이 넘도록 두사람의 악연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90년초 3당합당으로 두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다. 대권도전을 위해 구여권세력의 지지가 필요했던 김대통령은 전씨에게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현실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 전씨도 『김대통령이 유일한 대안』이라며 호응했다. 전씨는 14대 대선기간에 김대통령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사를 밝혔고 김대통령도 92년 민자당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와 대통령당선후 두차례나 전씨의 연희동자택을 방문했다.

또 지난해 1월에는 김대통령이 최규하 노태우 전대통령과 함께 전씨를 청와대로 초청, 과거 정권과의 화합과 협력을 강조해 두사람의 악연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화해기류도 잠시뿐, 이제 두사람은 역사청산의 현장에서 다시 적대관계로 마주섰다.

처음부터 물과 기름같았던 정치성향의 이질성을 갖고 정국격류에 함께 몸담았던 두사람의 인연은 이처럼 악연에서 출발해 결국 악연으로 끝나게 됐다.<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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