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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성은 간곳없고 끊긴 성벽만 남아(한문화 원류기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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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성은 간곳없고 끊긴 성벽만 남아(한문화 원류기행:7)

입력
199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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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무관심속 방치… 그나마 헛간·축사로 사용/고구려 400년 옛 도읍 출토유물은 창고서 깊은잠「고구려유적의 보고」 지안시에서는 최근 도시개발이 한창이다. 한국인관광객의 폭증으로 시 수입이 증가하자 시가 주거환경 개선과 도시정비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도시 못지 않은 상가와 아파트촌을 세우고 있다. 1,500년전에 융성했던 「황성 옛터」가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지안시의 중심거리인 단결로 승리로등의 주변에는 고구려문화 상품을 판매하는 전문상가와 가라오케 술집이 밀집한 환락가, 수백가구 단위로 이루어진 주거단지등이 들어섰다. 주야를 가릴 것 없이 북적거리는 거리의 상점들은 「고구려음식점」 「고구려랭면집」 「고구려술집」등의 한글간판으로 지안이 한민족의 고도임을 강조하고, 도로를 메운 인력거도 「조선민족차」라는 표지판으로 묘한 민족의식을 자극하면서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러한 도시개발사업으로 시중심부에 있던 국내성터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동쪽과 남쪽 성터는 복개·매립공사등으로 흔적도 없어졌으며 겨우 북쪽과 서쪽 성터만 군데군데 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쓸쓸히 증언해 준다. 주민들이 주요 성벽을 헛간등 부속건물로 개조한 것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성벽을 쌓았던 석재들을 아파트건축재료 쓰기 위해 파헤쳤다가 뒤늦게 알고 다시 쌓았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중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북문근처의 경우 2∼3의 높이로 허겁지겁 개축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것도 남북을 잇는 도로에 의해 곳곳이 절단돼 있고 성벽 양쪽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길게 늘어서 돌담길처럼 보였다. 퉁거우허를 따라 축조했던 서쪽 성벽도 주변가옥들의 뒷담이나 기타 건축물로 쓰이고 있다. 지안 조선족 중학교교감인 박창익씨의 안내로 찾아간 서쪽 성터의 한 민가는 성벽쪽으로 돼지우리를 만들어 10여마리의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집주인인 50대 중반의 여인에게 성벽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자 『고구려성』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20년 넘게 지안시에서 살고 있는 박교감은 『10년전만 해도 이곳 어디서나 높은 성벽을 볼 수 있었으나 시당국이나 주민들의 무지로 형편없이 훼손된 상태』라며 안타까워했다.

본래 국내성은 평지에 안과 밖의 벽을 장방형과 장방형의 돌로 쌓아올린 견고한 돌성. 동쪽 벽 길이가 554.7, 서쪽 벽이 664.6, 남쪽 벽이 751.5, 북쪽 벽이 715.2로 총연장 2,686에 이른다. 427년 장수왕의 평양천도후에도 정치·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시됐고 고구려 멸망후에는 발해, 금, 원대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파견하며 특별히 관리했던 지역이다. 또 청조에서는 만족조상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지대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250여년동안 폼페이 유적처럼 보존되고 있다가 19세기말에 원형 그대로 발견됐다.

1964년 지린성에서 첫번째로 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된 국내성에서는 5∼6년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고구려토기들이 굴러다니고 어느 곳을 파더라도 유물이 출토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성터자리가 아스팔트로 덮이고 성벽을 이루었던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고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게다가 지안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마저 지안박물관 지하수장고에 보관돼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유적은 훼손돼가고 그 안에 있던 유물은 깊숙이 감추어져 있으니 새로운 「봉금지대」인 셈이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고구려 400여년사를 간직한 왕도의 비밀은 언제쯤이나 풀릴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최진환 기자>

◎평양천도 왜 했나/귀족힘 약화시켜 왕권강화 1차목적/삼국통일 기반조성도 겨냥 “다중포석”

고구려는 장수왕 15년(서기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지금의 평양 동북쪽 대성산성으로 옮겼다. 2대왕인 유리왕 22년부터 424년간 고구려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를 학자들은 대체로 왕권강화와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먼저 왕권강화에 대해서는 당시 지안일대의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귀족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왕실의 자구책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한다. 5부의 잔존세력들이 왕을 이 지역에 묶어둠으로써 왕권을 계속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장수왕이 천도를 전후해 귀족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동천왕과 고국원왕때 위나라와 연나라의 침략으로 수도가 짓밟힘에 따라 좀 더 안전한 지역을 확보하는 동시에 평야지대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통일해 대국을 건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즉 중국의 거센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고 농경지 확대와 새로운 농법 개발을 통해 국토의 균형개발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수도 평양은 당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보장왕 27년(서기 668년)까지 241년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작가 메모/손순영씨

▲44년 서울 출생

▲홍익대 미대 중퇴

▲국전 특선2회, 문공부장관상 수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등 출품

지안 시내에는 노새가 끄는 마차가 많다.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 태어난 잡종인 노새는 힘이 세고 병에 잘 견디며 성질도 온순해 교통수단으로 애용돼온 동물인데 유난히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고구려의 전설이나 벽화에 수없이 등장하는 말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아파트와 주택으로 둘러싸인 북쪽성벽에서 스케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주변을 분주하게 오간다. 무너져가는 성벽, 그 위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 성벽끝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통해 왕성의 퇴락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그 사이를 지나는 마차로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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