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는 출범 직후에 자신을 「제2공화국의 계승자」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던진 이 한 마디의 말 속에는 과거의 군사정권과 단절하고 싶은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난 2년동안의 개혁정국을 살펴보면 장면 민주당정권과의 역사적 상관성이 신임 대통령의 생각보다 몇배 더 높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김영삼 대통령이 계승한 것은 민주적 정당성만이 아니었다. 「개혁」과 「통치」라는 두 가지 과제 사이에서 빚어지는 딜레마 역시 양자가 공유하는 것이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거의 동일한 사안이 개혁의 목록에 올려지는 형국이었다. 부정비리의 척결과 정경유착의 근절 및 정치군인에 대한 단죄가 그러하였다.
○장면정권 경우
어느 것이나 버거운 과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개혁은 정계와 관계 및 재계의 상층부를 심판하는 일이었다. 국가 사회를 통치하려 할 때 정부가 지지를 확보하여야 하는 사회의 상층부가 개혁의 타깃이었다는 말이다.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하였다. 개혁을 포기하면 민심이 이반되고 개혁을 강행하면 통치기반이 위축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장면총리는 방황하다 결국 선택의 순간을 놓치고 개혁과 통치의 책임을 다 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32년이 지났다. 강력한 대통령중심제가 구축되었고 결단력을 자랑하는 정치인이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딜레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청산없이 오직 성장만을 향해 달려온 한국근대사를 통해 부정과 비리의 정치는 이미 손을 대기 버거울 만큼 하나의 거대한 구조로 변모한 상태였다.
김영삼대통령의 임기 초반부에 정치개혁이 엉거주춤한 상태에 머물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치권 전체가 폭발하고 정권이 불안해질지 모를 위험성 탓에 사정의 수위와 폭은 제한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제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초반부의 개혁은 과거와의 단절을 갈망하는 층을 만족시키기에는 미진한 것이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층을 달래기에는 가혹한 것이었다.
게다가 「표적수사」에 대한 시비까지 가세하여 정부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심지어는 사정대상에 대한 동정론까지 사회 일각에 불러일으켰다. 이어 그러한 동정론은 지역감정과 맞물려 통치의 기반을 하나하나 허물어 갔다. 과거의 부정과 비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구 및 경북지역이 떨어져 나갔고 충청권은 김종필대표의 「축출」로 여권과의 연대감을 잃었다.
개혁과 통치의 딜레마를 중간에서 적당히 풀려던 초반부의 노력은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지방선거에서의 결과가 여소야대로 나타났고 정국운영의 기조가 「화해」로 선회한 것이었다. 여당내의 민정계를 달래지 않고서는 다수당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어려운 정치적 현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일까. 서석재전장관의 비자금 발언파문을 비켜가고 광주사태의 가해자에 대한 불기소처분을 이미 내린 상황에서 노태우전대통령의 구속사태가 터졌고 헌정파괴의 주동세력이 재판정에 설 전망이다.
세간에는 사건의 발생시기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울러 대통령의 통치스타일과 「숨은 의중」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막 시작할 후반부의 개혁은 결단력의 과실인가, 무모함의 결과인가. 쿠데타세력에 대한 기소는 과거와 단절하려는 충정의 발로인가, 대선자금의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궁여지책인가. 대통령은 딜레마상황에서 절충점을 찾다가 결국 개혁을 통해 통치기반을 확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렇다면 정치적 고비마다 자신의 「말」이 달라져온 상황은 일반시민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단은 국민이
국민은 모두 딜레마상황에 밀려 여기까지 온 대통령의 다음 조치를 지켜 보고 있다. 개혁의 목록에 막 올려진 비자금과 쿠데타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미래의 한국이 부패와 폭력의 정치적 악순환에서 탈출하거나 더 깊은 냉소와 불신의 수렁으로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누가 정치의 「관객」이고 「배우」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국민이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는 바로 이 시점에 대통령 자신은 국민을 지켜보고 있다. 민의 이외에는 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근절과 내란주동자에 대한 단죄처럼 국정 전반에 천파만파의 충격을 몰고올 사안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국민이 「독한」 마음을 먹고 일시적 정치불안과 경기하락까지 감수할 자세라면 대통령은 「성역없는 사정」에 대한 의지를 키울 수밖에 없다.
결단의 주체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국민 모두인 것이다. 대통령을 지켜보기 이전에 먼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정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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